본문 바로가기
형설지공/경제경영

공적자금투입과 구조조정비용

금융불안이 지속되고 있는 본질적 이유는 아직도 부채가 수익성에 비해 과다한 기업들이 많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현 금융불안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미래상환능력에 근거하여 기업의 존폐문제를 냉정하게 판단함과 아울러 그에 따른 금융기관의 자산건전성을 현실적으로 판단하여 부실기업 및 금융기관에 대한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실효성있는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공적자금이 추가적으로 조성되어야 하며, 이 때 금융권에 대한 공적자금의 투입은 단지 금융기관의 대차대조표를 클린화하는 의미를 넘어서서, 과감한 부실기업 퇴출을 유도하기 위한 완충기(buffer)의 확보를 의미한다. 공적자금의 투입규모는 구조조정비용과 구별되어야 하며, 공적자금의 적기 투입은 구조조정의 최종비용을 줄일 수 있다. 늦은 감이 있으나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투신사로 대표되는 금융기관의 부실문제로 불거진 금융불안이 지루하게 지속되는 가운데, 현대 등 실물부문이 자금압박을 받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문제는 채권시장의 냉각에 있지만, 이면에는 투신사의 부실과 이로 인한 투자자(엄밀하게는 준예금자)의 환매요구, 시중 유동성의 은행권 편중 유입 등이 자리하고 있다. 잠복된 금융부실 문제는 대출, 회사채, CP 등의 만기가 도래함에 따라 한계기업의 자금사정을 압박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금융불안과 기업자금경색의 악순환 시정되어야>

기업의 재무제표와 이에 대한 다양한 분석들이 제공하는 분명한 메시지는 외환위기 발생이후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업부문의 수익성에 비해 부채가 여전히 과다하다는 점이다. 작년 한해동안 워크아웃기업은 평균적으로 영업이익이 지불해야 할 이자의 반 정도 밖에 미치지 못하였고, 워크아웃을 받고 있지 않은 기업중에도 많은 기업이 비슷한 실정에 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기업의 사정이 이럴진대, 기업여신이 많은 금융기관의 자산건전성이 좋을 수 없으며, 이러한 문제가 비단 투신사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금융불안은 이와같이 취약한 기업부문의 재무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어 결국 금융부실이 더욱 커지게 되는 악순환을 유발한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잘라내는 것이 현재의 경제불안을 풀기 위한 최우선 과제이다. 이는 그동안 이미 막대한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권도 그러하거니와, 그 동안 원칙적으로 대주주 책임하에 구조조정을 이행해왔던 제2금융권의 부실문제를 본질적으로 치유하기 위해서 공적자금의 추가조성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이든 금융기관이든 문제의 해결을 위해 왜 계속 공적자금으로 충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상당수의 기업과 금융기관이 현실적으로 지급불능 상태에 빠져 있다면 거기에 민간자본이 투입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해당 기업이나 금융기관의 재무제표에 포착되지 않는 엄청난 프리미엄이 존재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현실이 그러하지 않을진대, 공적자금의 적절한 투입이 없고서는 문제의 해결이 난망하다.
납세자의 저항, 도덕적 해이 문제에도 불구하고 공적자금의 추가조성이 불가피한 또 다른 이유는 부실기업을 정리할 수 있는 자본여력을 갖출 수 있도록 금융기관에 자금이 충분히 투입되지 않을 경우, 금융기관은 채무상환능력이 없는 기업에 신규자금을 지속적으로 투입하게 되어 결국 부실채권만 확대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점이다. 파국에 이르러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더욱 많은 재원이 필요하게 되고, 공적자금의 부담은 그 만큼 더 늘어나게 된다.

<공적자금투입과 구조조정비용>

여기서 우리는 구조조정과 관련한 공적자금의 투입 (government expenditure) 규모와 구조조정의 최종비용(final costs)이라는 두 개념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 구별하면 자산관리공사 및 예금보험공사의 채권발행규모, 특수은행에 대한 정부의 현금 및 현물출자 등은 전자에 포함된다. 후자는 지출과 회수분의 차액, 회수기간동안의 이자비용 등을 포함한다. 대개 손실분담과정에서 비롯되는 정치적 및 사회적 비용은 차치하더라도, 비용의 단순셈에서 누락되기 쉬운 경제적 요인은 타이밍이다. 부실문제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상황과 요인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언제, 얼마만큼의 자금이 투입되는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구조조정의 비용은 기회비용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개념구분에 근거할 때, 중요한 것은 정부의 정책목표가 공적자금의 초기지출(initial outlays)의 최소화가 아니라 최종비용(final costs)의 최소화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납세자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적게 투입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투입된 자금의 원리금과 최종 회수자금의 차이를 얼마나 줄이느냐의 문제이다.

정책입안시 공적자금의 투입을 한푼이라도 아끼자는 생각은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이러한 인색함이 오히려 문제의 크기를 필요이상으로 확대시킬 수 있으며, 지난 금융위기 극복과정을 되돌아 볼 때 아쉬운 대목이 더러 눈에 띈다. 이를 일일이 지적하여 판단하기에는 시기 상조이므로, 눈을 돌려 80년대 미국의 저축대부조합(savings & loans : S&L)의 부실문제를 살펴보자.

<미국의 80년대 부실S&L정리의 교훈>

1980년초 금리상승과 더불어 불거진 S&L의 부실문제는 1982년말 현재 415개 S&L(총자산 2200억달러)이 지급불능 상태에 있었으며, 1983년초 이를 정리하였다면 250억달러가 소요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당시 S&L의 예금보험기구인 FSLIC는 부실 S&L의 정리를 위해 이에 훨씬 못미치는 63억달러 밖에는 갖고 있지 않았다.
이에 미국정부는 추가재원을 확보하기 보다는 규제를 완화하여(regulatory forbearance) 지급불능상태의 S&L을 보호하는 한편, 자산가치의 회복을 통한 점진적 치유를 기대하였다. 규제완화(느슨한 회계원칙, 손실의 이연처리 등)는 오히려 S&L산업의 자산확대를 초래하여, 1983-1985년동안 S&L 총자산이 56% 확대되었다. (같은 기간동안 은행자산은 24% 확대되었다.)
부동산시장의 지속적인 침체로 S&L의 자산부실문제가 더욱 확대되자, FSLIC는 재원확보를 위해 의회의 협조를 얻고자 노력하였으나, S&L산업이 의회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좌절되었다. FSLIC는 1988년 222개사를 (총자산 1160억달러) 정리하였으나, 현금재원이 부족하였으므로 지급보증, 세제혜택 등의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8년말 250개사 (총자산 808억달러)가 여전히 지급불능 상태에 빠져 있었다. FSLIC 스스로도 문제의 해결보다는 문제의 심각성을 축소하기에 급급하였고, 납세자 자금의 추가유입 필요성을 인정치 않으려는 저항도 계속되었다. 또한 공화 및 민주 양당의원들이 S&L위기에 직·간접으로 연관되었으므로 의회도 문제자체를 회피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정부정책이 획기적으로 전환되는 계기는 1989년 부시행정부의 출범이다. 정부는 부실기관의 단순처리 차원에서 예금자보호 차원으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금융기관개혁구제법(FIRREA)의 제정으로 S&L의 도산관리 및 보험관련 업무가 이미 재정적으로 파산한 FSLIC에서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로 이관되었다. 또한 부실 S&L정리를 위해 RTC가 설립되었고 1995년 업무종료까지 소요된 비용은 재정부담 1,320억달러를 포함하여 총 1,600억달러에 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경험이 시사하는 중요한 점은, 정부의 정확한 문제파악 능력 부족과 부실 정리의 지연처리가 부실을 심화시켜 결국 필요이상의 재정비용을 부담하게 한다는 점이다. 규제완화 및 시장규율에 의한 자연치유를 기대하는 정부대응은 오히려 도덕적 해이와 부실심화를 초래한다. 규제완화에 따른 이익은 S&L의 소유주와 경영진에게, 부실에 따른 손실은 납세자에 돌아가는 아이러니를 낳은 것이다.

<금융 및 기업구조조정 가속화를 위한 공적자금>

우리의 현실로 돌아오자. 금융구조조정의 최종비용 최소화를 위해서는 공적자금을 추가로 조성하여 보다 적극적인 기업 및 금융기관에 대한 구조조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금융권에 대한 공적자금의 투입은 단지 금융기관의 대차대조표를 클린화하는 의미를 넘어서서, 부실기업에 대한 과감한 퇴출을 유도하기 위한 완충기(buffer)의 확보를 의미한다. 환자를 수술대에 올려 치부를 말끔히 치료하기 위해서 일정량의 혈액 공급이 필수적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금융권이 보유하고 있는 부실채권의 규모를 현실적으로 제대로 평가하고 아울러 정부 및 개별 금융기관 차원의 실효성 있는 부실채권의 정리가 필요하다. 기업의 단기 유동성 문제 해소차원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부채구조조정이 필요하며, 채권금융기관의 손실은 상각 혹은 대손충당금 적립 등을 통해 재무제표에 포함시켜야 한다. 기업의 진정한 미래채무상환능력에 근거하여 기업의 존폐를 결정하고, 채권자에 의해 생존 가능성과 타당성이 입증된 기업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독자생존이 가능한 만큼의 지원이 필요하다. 물론 자금지원은 해당 소유주나 기업인이 아닌 기업을 대상으로 집행되어야 한다. 강도 높은 기업구조조정에 따라 현재화되는 금융기관의 손실은 주어진 룰에 따라 금융기관, 예금자, 투자자 등에게 손실이 분담되어야 하며, 자력에 의한 자본여력 회복이 불가능한 금융기관은 과감하게 정리되어야 한다.
얼마만큼의 공적자금이 더 조성되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참으로 어렵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현재 국회의 동의를 얻어서 집행되고 있는 공적자금으로서는 현재 봉착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이다. 추가조성규모를 산정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고려요소는 부실채권규모와 회수율에 대한 시장여건을 고려한 현실적 판단이다. 손실분담은 모르지만, 이들 변수는 정치적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관련 정책입안자 및 국회의 현명한 판단과 시장참여자와의 심도있는 논의가 요구된다.

<주간금융동향 9권 30호, 2000.8.5-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