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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경제인]존 메이나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

존 메이나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

- 경제학계의 마지막 거인

1930년대의 세계경제는 사상 유례없는 극심한 불황에 허덕이고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일거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웠고, 끼니조차 잇지 못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케인즈는 이 불행한 사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열심히 파고들었다. 그의 노력은 1936년에 출판된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 책 덕분에 경제가 돌아가는 원리에 대해 새로이 눈을 뜨게 되었다. 현대의 경제학 책들 중에서 으뜸가는 고전을 말해보라면 거의 모두가 주저없이 이 책을 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케인즈는 빅토리아시대 영국의 명문가정에서 태어나, 이튼고등학교에서 케임브리지대학으로 이어지는 정통 엘리트코스를 밟는 행운을 누렸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경제학자이자 논리학자였으며 어머니는 케임브리지시의 시장을 역임한 활동가였다. 이런 좋은 가정환경에 머리까지 남다르게 타고났으니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다는 한탄이 나올 만도 하다.(옥에도 티가 있듯, 그도 용모만은 별로 행운을 타고나지 못했다).그는 이튼에 재학하고 있을 때부터 수학에서 발군의 성적을 내는가 하면 연극 등에도 재능을 발휘해 이미 미래의 스타가 될 자질을 내비치고 있었다. 케임브리지대학 재학 시절에는 러셀(B.Russell), 화이트헤드(A. Whitehead)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이끄는 토론 클럽에 가입해 탐구정신을 한층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러셀은 그와 만나 얘기할 때마다 자신이 무척 초라하게 느껴졌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당시의 케인즈가 얼마나 명석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전문화가 지나친 나머지, 오늘날의 경제학자는 다른 학문분야는 물론 경제학 안의 모든 분야에 대해서 두루 잘 알기도 힘들다. 그런데 케인즈는 경제학에만 정통한 것이 아니라, 철학, 문학, 예술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상식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전문가적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 만능 지식인은 돈 버는 또 재능이 있어, 주식투자를 통해 많은 돈을 끌어 모았다 그는 아담 스미스 이래의 모든 경제학자들 중에서 리카도 다음으로 돈을 많이 번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주식투자의 비결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 템스 강가로 나가 물결의 상태를 보고 어떻게 보고 어떻게 사고 팔지를 결정했다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말을 들어보면 그의 높은 학문적 경지와 경제적 성공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었던 것 같다.

앞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지만, 케인즈는 수요(需要)의 부족 때문에 대공황이 발생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요즈음에는 경제학을 처음 배우는 사람조차 수요의 부족이 불황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의 수요측면을 거의 무시하고 있었던 당시 경제학계의 풍토에서 이와 같은 인식은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 아닐 수 없었다. 불황의 원인이 수요의 부족에 있다는 이론적 인식은 수요를 촉진시킴으로써 대공황의 어둠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는 처방으로 이어지게 된다.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잡고 싶었을 당시의 사람들이 이 처방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고전파에서 신고전파 경제학으로 면면히 이어져온 경제학의 전통은 케인즈에 이르러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된다. 경제학의 역사를 보면 이론에 큰 변혁이 나타나도 이를 혁명이라고까지 표현하는 경우가 지극히 드물다.

'케인즈 혁명'이라는 표현에서 사람들이 193년대에 이 이론적 변학 과정을 얼마나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그에 의해 새로이 제시된 경제학이 이전의 경제학과 다른 점은 비단 수요측면을 증시한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즈음 우리가 거시(巨視)경제이론(macroeconomics)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거대한 분야가 그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져 추가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적인 경제이론에서는 소비자나 기업 같은 개별적 경제주체의 경제행위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는 미시(微時)경제이론(microeconomics)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반면에 거시경제이론은 국민경제 전체의 움직임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케인즈 이전의 경제학은 이렇다할 거시경제이론을 갖고 있지 못한 형편이었다. 오늘날의 주류경제학은 기본적으로 신고전파의 미시경제이론과 케인즈의 거시경제이론의 접목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케인즈는 상아탑만을 지키지 않고 언제라도 부름이 있으면 사회에 봉사하는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수습과 정을 논의하는 베르사유 회의에 재무성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전후의 국제금융질서 구축에 관해 논의하는 브레튼우즈 회의에 영국대표로 참석하여 커다란 활약을 보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회의의 주역은 그와 미국을 대표하는 화이트(H. White) 두 사람이 맡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회의의 궁극적인 승자는 평범한 관리에 불과했지만 미국의 막강한 힘을 등에 업고 있었던 화이트였다. 그의 학문적 명성도 국제정치의 냉엄한 논리 앞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더군다나 객관적으로 보아 케인즈의 제안이 화이트의 제안보다 더욱 합리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밀려 나는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경제학에서 거인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평범한 사람 중 조금 더 똑똑한 사람이 학문의 흐름을 주도하는 시대를 맞게 되었다. 거인이란 워낙 오랜만에 한 명씩 나오는 법이어서, 짧은 현대경제학의 역사에서 거인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 모른다. 게다가 경제학 연구의 성격이 날로 전문화되어 가다 보니 거인의 풍모를 가진 경제학자가 나올래야 나오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인의 시대에 대한 동경의 마음까지 지워버리지는 못한다. 케인즈는 그 시대의 끝을 장식하는 마지막 거인으로서 뭇사람의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는 그와 같이 다재다능하고 멋진 경제학자를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문우식 < 서울대 국제지역원 교수 mwoosik@gias.snu.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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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시스템은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균형이나 붕괴로의 수렴없이 만성적으로 정상 이하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완전, 혹은 거의 완전한 고용이란 매우 드물고 단기적인 현상이란 증거가 있다"

- 케인스 "일반이론"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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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반기의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일 뿐만 아니라 혁신적 사상가로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1883년 같은 경제학자였던 존 네빌 케인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케인스는 처음 수학을 배웠다.

그러나 그의 은사이자 당시 영국 경제학의 대부였던 마샬(A Marshall)의 권유에 따라 경제학을 배우게 됐다.

대학 졸업후 케인스는 2년간의 공직생활을 하게 됐다.

이때부터 케인스는 현실의 경제정책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며 그 결과로서 1913년 처녀작 "인도통화 및 재정"(Indian Currency and Finance)을 출간했다.

이어 케임브리지대에서 강의를 하던 케인스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마자 곧 재무부에 들어간뒤 종전후 베르사유 평화조약에 영국의 재무부 대표로 참여했다.

그러나 이 조약이 독일을 파멸시킬 만큼 지나친 전쟁배상금을 요구하고 있다고 격렬하게 비판하고 대표직을 사임했다.

1919년 이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평화의 경제적 영향"(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이란 책을 집필했다.

이 책이 케인스를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평화의 경제적 영향이 현실의 정치경제정책에 대한 대안가로서 케인스의 명성을 높였다면 경제이론가로서 케인스를 저명하게 만든 것은 1923년 출간된"화폐개혁론"(Tract on Monetary Reform), 1930년 출간된 "화폐론"(Treatise on Money), 그리고 1936년 완성된 "일반이론"(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 등 3권의 책이다.

특히 일반이론은 케인스 자신의 이전 저작들은 물론 이른바 고전파 경제학이라 불리는 기존 이론틀을 벗어나는 혁명적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출간으로 현대 화폐금융론과 거시경제학의 기초가 정립되었고 이는 이후 수십년간 경제학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유행하게 됐기 때문이다.

일반이론의 핵심은 국민경제가 항상 완전고용상태에 머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속적인 비자발적 실업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인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케인스의 일반이론은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당시의 주요경제문제로 떠올랐던 만성적 실업에 대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시장의 자동적인 균형회복기능을 강조하는 고전파 경제학이 만족스러운 원인규명과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시작됐다.

고전파경제학 체계를 비판 극복하는 케인스이론을 기리기 위해 이른바 케인스혁명이란 표현이 사용되기도 한다.

실상 경제학의 역사를 살펴 보면 종종 파라다임 변화에 대해 혁명이라는 이름이 사용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 데,1870년대의 근대경제학성립을 한계혁명이라 칭하는 것은 또 하나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케인스혁명이라는 용어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사건으로 대공황이래의 실업이 소멸되고 케인스의 이론적 결론이 입증되는 상황하에서 "케인스혁명" (Keynesian Revolution)이라는 저서가 1947년 클라인(R Klein)에 의해 출간되면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인스 이론의 혁명성에 관해서는 일반이론의 해석과 관련해 상당한 논란이 있다.

불완전고용의 존재 및 불균형경제를 분석하려는 케인스의 의도나 정부개입을 정당화하는 케인스 이론의 정책적 합의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이론적 내용에 관해서는 학자들간에 강조점의 큰 차이가 존재해왔으며 이로 인해 여러 학파가 분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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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적인 임금정책이 완전고용을 유지시킬수 있다고 믿을 이유가 없다. 그러한 수단은 경제체제의 자동조정을 보장할수 없다"

- 케인스 '일반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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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의 경제이론은 크게 고용, 이자, 임금이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케인스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던 문제는 영속적인 불완전고용을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케인스에 따르면 한 나라의 고용수준은 유효수요에 의해 결정된다.

지금 완전고용수준에서 저축이 투자를 초과한다고 하면 총수요는 완전고용을 유지하기에 불충분해진다.

이같이 유효수요가 부족함에 따라 국민소득은 하락하게 된다.

따라서 불황이 발생하게 되고 감소된 국민소득으로부터 저축이 감소해 투자와 일치하고 불완전고용 균형에 이르게 된다.

케인스에 따르면 저축이 투자를 초과해 유효수요가 부족한 경우 불완전고용은 불가피하게 되며 경제체제내 완전고용을 회복시키려는 어떠한 내재적인 경향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이의 법칙"이 부정된다.

케인스 이론의 두 번째 핵심은 이자율이 저축과 투자의 균형을 가져온다고 하는 고전파 이론을 부정하는 데 있다.

즉 저축이 투자를 초과한다면 고전파에서 주장하듯이 이자율 하락이 아니라 고용과 국민소득의 감소에 의해 저축이 투자와 일치하게 된다.

케인스는 이자가 저축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 유동성을 포기한 데 대한 보수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케인스에 따르면 이자율은 각 개인의 유동성선호와 중앙은행의 정책에 의해 결정되는 유동성 공급간의 균형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저축이 증가한다고 해도 이자율은 불변할 수 있다.

케인스가 이자율을 저축과 투자간의 균형을 보장하는 변수로 보는 견해에 반대한 데엔 두가지 이유가 지적된다.

첫째 이자율이 충분히 낮아 유동성공급의 증대가 있더라도 이자율이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유동성함정(liquidity trap)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인해 투자전망이 극히 비관적이라면 이자율이 하락한다고 하더라도 완전고용을 달성할 만큼의 투자를 늘리지 못한다는
근거에서다.

따라서 완전고용을 위해서는 직접적으로 정부부문이 공공투자를 증대시키는 일이 불가피하다.

실상 케인스 자신이 일반이론을 쓰게 된 동기도 공공투자는 민간투자를 구축함으로써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하는 영국 재무부 견해(Treasury view)를 반박한 데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케인스에 따르면 공공투자는 민간투자를 구축할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이에 의해 생긴 소득증대는 민간기업에 투자증대에 대한 유인 및 낙관적인 전망을 줄 수 있다.

나아가 공공 및 민간부문의 총투자가 증가한다면, 주어진 소비성향하에서 총수요 및 고용이 늘뿐 아니라 승수효과(multiplier effect)를 통해 최초투자증가보다 더 큰 비율로 늘어난다.

마지막으로 케인스 이론의 임금이론은 임금인하와 관련한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를 통해 총체로서의 경제를 분석하는 거시적 방법론의 유용성을 보여준다.

케인스 이전의 고전파적 사고방식은 임금인하는 생산비의 하락을 통해 고용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파악됐다.

따라서 만약 실업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노동조합 등의 압력에 의해서 임금이 경직화됐기 때문인 것으로 간주됐다.

이에 대해 케인스는 임금을 생산비 측면에만 집중시켜 파악하는 이와 같은 개인주의적 이론은 총체로서의 경제사회를 분석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보았다.

즉 임금인하의 생산비감소효과와 더불어 임금의 총수요감소효과(개별기업차원에서 보았을 때 임금인하)는 생산비 하락에 해당하지만 사회전체차원에서 보면 임금인하는 임금소득하락을 통한 총수요감소를 가져온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봤다.

케인스에 따르면 임금인하는 유효수요를 감소시킴으로써 오히려 고용수준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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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이윤이 있는 곳으로 신규투자를 유인하는 사회적 기능을 하는 하나의 제도로서 월스트리트의 성공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주장할 수 없다"

-케인스의 "일반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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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의 경제관은 한 마디로 불안정한 시장경제를 정부개입에 의해 보완함으로써 자본주의를 강화할 수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는 통화문제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사실상 케인스는 "위기상황 아래에선 재무장관이 허리끈을 풀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재량적인 통화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로 인해 케인스는 관리통화론의 시조로 간주되고 종종 인플레이션주의자로 비판받는다.

그러나 관리통화제도를 주장했다는 것이 바로 인플레를 찬성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케인스가 관리통화론을 주장한 이유는 통화를 자유방임에 맡겨 두면 오히려 인플레나 디플레가 발생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가안정을 위해 정부가 통화를 관리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관리통화제도는 물가불안이 야기하는 "위험"과 "불확실성", 그리고 "무지"를 줄이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다.

인플레에 반대하는 케인즈의 사고는 그의 초기 논문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가장 좋은 길은 통화가치를 하락시키는 것"이라는 레닌의 말을 옳다고 한 대목이 그렇다.

"인플레는 부정(unjust)하고 디플레는 불변(unexpedient)하다"는 구절은 널리 알려져 있어 더이상 부연설명이 필요없다.

다만 케인스는 "인플레와 디플레 둘 중에서 디플레가 더욱 나쁘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인플레주의자라고 오해받을 소지를 남겼다.

갈브레이스는 지난 30년대의 대공황(디플레)과 20년대의 하이퍼인플레 상황하에서 사람들은 디플레와 이에 다른 실업의 고통보다는 오히려 하이퍼인플레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디플레에 대한 우려가 인플레를 능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얘기다.

따라서 케인스의 이론적 관심도 물가변화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 투자부족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를 위해 케인스는 우선 통화공급의 증가가 그만큼 물가를 상승시킨다고 하는 화폐수량설을 비판한다.

화폐수량설이 장기적으로는 사실일지 모르지만 단기적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게 케인스의 견해다.

즉 그는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어 있다"고 하면서 개인의 화폐보유나 퇴장성향같은 단기적 요인이 금융제도가 발전돼 있는 현대 자본주의에선 물가변화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봤다.

특히 퇴장수요란 존재는 경제진보의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는 투자가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케인스에 따르면 19세기 말까지 자본주의는 고소득층의 높은 저축률이 높은 투자로 전환돼 지속적으로 성장해왔으나 20세기 들어선 퇴장으로 인해 저축이 증대돼도 반드시 투자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케인스는 퇴장수용의 존재에서 자본주의의 경제적 악(evil)을 찾았고 퇴장을 즐기는 지주계급을 "안락사"(euthanasia of the rentier)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 현대 자본주의제도에서 퇴장의 존재는 증권시장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케인스는 증권시장에 대한 투자활동을 "투기(speculation)"와 "기업(enterprise)"으로 구분했다.

기업을 장기적 수익성기준에서 저축을 투자로 전환시켜주는 기능을 하는 활동이라고 규정했다.

반면 투기는 시장의 심리를 예측하여 단기적 자본이득을 노리는 활동으로 투자와 전혀 관련없는 퇴장활동이라고 지적했다.

케인스는 따라서 증권시장이 투기화하고 카지노화되는 위험을 경계한다.

그가 "최대이윤이 있는 곳으로 신규투자를 유인하는 사회적 기능을 하는 하나의 제도로서 월스트리트의 성공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주장할 수 없다"고 역설한 것은 이같은 맥락에서다.

결국 케인스는 "중앙기구를 통한 통화신용의 의도적 관리"뿐만 아니라 저축과 투자에 있어서도 "사적 판단과 사적 이익의 손 안에 맡겨서는 안된다"며 정부 개입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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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은 부당하며 디플레이션은 훌륭한 정책이라고 할수 없다.
독일과 같은 극단적인 인플레이션을 제외한다면 디플레이션 쪽이 더 나쁘다.
빈곤한 사회에서는 금리생활자를 실망시키는 것보다 실업을 발생시키는 쪽이 더 나쁘기 때문이다'

- 케인스의 '화폐개혁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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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가 20세기 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보다도 경제이론가로서의 역할에 있다.

학문적으로 봤을 때 케인스의 영향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평가된다.

그의 이론은 이른바 "IS-LM분석"으로 알려진 신고전학파종합에 의해 오늘날거시경제학의 기본틀로 계승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이후 일반이론의 해석을 둘러 싸고 불균형학파나 후기 케인시언 학파로 발전되면서 지금껏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 경제정책의 자문가로서, 그리고 사회.도덕적인 문제의 개혁가로서 케인스의 영향력은 더욱 두드러진다.

우선 정책자문가로서 케인스의 역할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의 국제통화질서의 구축에 미친 영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경제학자로서 케인스가 활동했던 시대는 빈번한 국제통화질서의 혼란이 있었던 때였다.

따라서 케인스는 일찍부터 독일의 배상금문제나 영국의 금본위제도 복귀문제 등 각종 통화개혁문제를 연구하고 비판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대공황을 겪으면서 그의 관심은 일시적으로 대내문제에 집중된다.

통화제도 개혁문제가 케인스에게 다시 관심사가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초 사흐트안이라 불리는 독일의 신질서를 위한 통화개혁안에 대해 영국 측의 대안을 제시한게 계기가 됐다.

세계중앙은행 혹은 청산동맹이라고도 불리는 이 안에서 케인스는 고정환율제하의 다자간 무역수지 결제를 지지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고정환율제도를 선호하고 외환시장에서의 중앙은행 개입이나 자본이동에 대한 규제등을 찬성했다.

"평가절하라는 방법은 다른 좋은 수단이 실패했을 경우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게 되는 나쁜 방법이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또 케인스는 다자간 결제를 위한 방코(bancor)등을 창출할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케인스의 통화제도개혁안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화이트안을 둘러싸고 영국이 대미협상을 벌이는데 기초자료로 활용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을 양날개로 삼아 출범한 브레튼 우즈체제가 주로 미국의 안에 의거해 성립했지만 이후 특별인출권(SDR) 발행등은 방코를 창출하자는 케인스의 제안이 반영된 것이다.

한편 케인스 혁명은 사회.도덕적 측면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도덕적인 측면에서 케인스혁명의 의의는 자연법적 규법을 부정하고 청교도적이고 도덕적인 경제관에 대해 쾌락주의를 찬양한데서 찾을 수 있다.

실상 케인스의 논리는 저축을 줄이고 저축하려는 노력을 포기함으로써,그리고 소비를 늘림으로써 각 개인은 국민소득을 증가시키고 사회공동의 이익에 기여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경제정책은 개인의 희생을 촉구하는 대신 개인의 욕망을 만족시키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견해다.

적자예산정책을 추구하고 임금을 증가시키며, 유급휴가를 늘리고 국민 모두를 위한 사회보장제를 실시하는 것등은 모두 이같은 케인스의 논리위에 서있다.

따라서 케인스에 따르면 도덕적으로 정당화된 정부의 공공지출은 미래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

사회적 측면에서 케인스 혁명의 의의를 발견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이후 30여년간에 걸친 세계경제의 고도성장기간동안 "대중생산-대중소비시대"를 열어주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케인스는 20~30년대 대공황이후 독점의 일반화, 노동조합의 강화, 임금과 가격의 경직성 증대 등으로 인해 고전학파적 세계관과 이에 근거한 무제한적 자유방임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되고 말 것으로 봤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신봉하는 열렬한 자유주의자로서 케인스는 정부가 올바른 경제제도의 틀을 제공해 개인과 기업의 자유선택의 가치를 보다 쉽게 실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이론이 당시 점증하던 사회주의의 압력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사회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자본주의가 내놓은 최저임금제나 복지국가 등의 개념은 케인스 이론에 의해 훌륭히 뒷받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