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 자본주의체제의 준엄한 고발자
산업혁명은 엄청난 생산력의 향상을 가져다주었고, 이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현저하게 높아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번영의 그늘에는 끼니를 잇기도 힘들만큼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에 시달리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이 엄연한 현실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 시대의 노동자가 요즈음처럼 하루 여덟 시간을 근무한다는 것은 꿈 속 에서나 가능한 행운에 속했다. 고작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 어두운 탄광에서 하루 종일 비지땀을 흘려야만 했던 사례도 있었다. 하루 노동시간을 10시간 반으로 제한하자는 제안이 당시에는 거의 혁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정도였으니 그 실상이 어땠는지는 구태여 말할 필요조차 없다.
동정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처럼 비참한 상황을 보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 시대의 깨인 지식인들은 사회구성원 모두가 고르게 잘사는 유토피아적 사회를 갈망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상은 어디까지나 꿈이었을 뿐 현실사회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의 결과로 나온 논리적 결론이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정연한 논리와 구체적인 실행계획도 없이 가슴으로만 혁명을 꿈꾸는 그들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는 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하려면 우선 그 체제의 기본적 운동법칙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특징을 가진 체제라고 말한다. 하나는 계속적인 자본축적과 성장이며, 다른 하나는 노동의 착취와 소외(疎外)라는 것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그의 자본주의 비판이 고전파 경제학의 두 이론적 기둥, 즉 자본축적이론과 노동가치설에 의해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전파 경제학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산업사회를 정당화시키는 성격의 이론체계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역설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노동가치설(labor theory of value)은 마르크스 이론의 중심 축 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그의 이론체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어떤 상품이 진정한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사용된 노동의 양과 같다는 것이 이 이론의 내용이다. 경제학에서는 무엇에 의해 상품의 가치가 결정되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되어 있는데, 노동가치설은 이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평범한 이론이 어떤 이유로 마르크스의 혁명적 이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자본가에 의한 노동의 착취와 그에 따른 노동자의소외라는 것이 바로 이 노동가치설에 의해 이론적으로 입증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자본가가 일단 노동자를 고용하게 되면 그가 생산해낸 모든 상품은 자본가의 차지가 된다. 노동자는 이렇게 자신이 노동하여 얻은 결과로부터 소외되고, 대신 자본가가 지급하는 임금을 받게 된다. 그가 받는 임금은 노동을 재생산하는 데드는 비용, 다시 말해 생존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의 수준에서 결정된다. (자본주의 체제에는 수많은 잉여노동자가 존재하고 있어 임금을 생존수준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막는다.) 그 결과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해낸 가치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고, 양자의 차이는 이윤으로서 자본가의 소득이 된다. 노동가치설에 의하면 이윤은 기본적으로 자본가가 착취하는 잉여가치(剩餘價値)라는 성격을 갖게 된다.
마르크스 이론의 방대한 체계는 1867년에 제1권이 나온 <자부론(Das Kapital)>에 집대성되어 있다. (제2권과 3권은 그가 죽은 후에야 출판될 수 있었다.) 이 책은 인류의 역사상 성서 다음으로 널리 읽혀진 책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난해하기 그지없는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하면서 읽은 사람이 과연 몇 이나 될지는 잘 알 수 없다. 하여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이렇게 방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그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하다.
마르크스의 개인적 생활은 파란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는 베를린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언론계에 투신하여 신문사 편집인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 신문이 진보적 성향 때문에 당국의 탄압을 받자 파리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 시절 그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한 사람을 사귈 수 있었다. 엥겔스(F. Engels)라는 사업가 겸 아마추어 학자가 바로 그 사람이었는데, 그는 마르크스의 충실한 동지이자 동시에 재정 지원자로서 일생 동안 커다란 힘이 되어주었다. 엥겔스가 없는 마르크스는 거의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돈독했다.
마르크스가 죽은 뒤 <자본론>의 나머지 부분을 맡아 출판한 것도 바로 엥겔스였다.
마르크스는 파리에 살면서도 계속 프로이센을 비판하는 글을 썼기 때문에 프로이센 정부는 프랑스 정부에 그를 추방하라는 압력을 가해왔다.그는 할 수 없이 브뤼셀로 이주해야 했고, 그후 잠시 프로이센으로 돌아가 혁명을 선동하다 쫓기는 몸이 된다. 이제는 파리로 돌아갈 수도 없어 영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는 죽을 때까지 런던의 빈민가에서 살았는데, 언제나 극도의 빈곤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러나 대영박물관에 처박혀서 책과 씨름하는 생활 속에서 마르크스의 이론은 서서히 골격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 어두운 궁핍의 시기가 사실은 학자로서의 그가 완성되어가는 보람된 시기였던 것이다.
시커멓고 넙적한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 수염이 덥수룩한 그의 모습에서 세련된 구석이라고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용모만 세련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생활 자체도 무질서의 연속이었다. 주위 사람의 평에 의하면 그는 몸을 씻고 속옷을 갈아입는 일조차 게을리했다고 한다.
또한 한참을 빈둥거리며 놀다가도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며칠이고 밤을 새워 매달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병으로 세 자녀를 잃고 관을 살 돈 조차 없었던 궁색한 살림 속에서도 돈이 조금 생기면 흥청망청 써버렸다고 한다. 천재의 사생활을 보면 의외로 무질서한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마르크스에서 무질서의 극치를 보게 된다. 그러나 처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남달리 지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사회상을 고려할 때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 분노를 거리의 투쟁으로 발산하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치밀한 분석으로 승화시킨 점에서 학자로서의 위대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연구에 힘입어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체제의 성격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사실이다. 또한 혁명만이 노동자를 그 비참한 상황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는 그의 외침 때문에 좀더 인간적인 자본주의체제를 만들 수 있었던 측면도 있다.
모두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나, 그가 근대사회에 끼친 영향이 지대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 자본주의체제의 준엄한 고발자
산업혁명은 엄청난 생산력의 향상을 가져다주었고, 이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현저하게 높아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번영의 그늘에는 끼니를 잇기도 힘들만큼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에 시달리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이 엄연한 현실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 시대의 노동자가 요즈음처럼 하루 여덟 시간을 근무한다는 것은 꿈 속 에서나 가능한 행운에 속했다. 고작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 어두운 탄광에서 하루 종일 비지땀을 흘려야만 했던 사례도 있었다. 하루 노동시간을 10시간 반으로 제한하자는 제안이 당시에는 거의 혁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정도였으니 그 실상이 어땠는지는 구태여 말할 필요조차 없다.
동정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처럼 비참한 상황을 보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 시대의 깨인 지식인들은 사회구성원 모두가 고르게 잘사는 유토피아적 사회를 갈망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상은 어디까지나 꿈이었을 뿐 현실사회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의 결과로 나온 논리적 결론이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정연한 논리와 구체적인 실행계획도 없이 가슴으로만 혁명을 꿈꾸는 그들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는 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하려면 우선 그 체제의 기본적 운동법칙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특징을 가진 체제라고 말한다. 하나는 계속적인 자본축적과 성장이며, 다른 하나는 노동의 착취와 소외(疎外)라는 것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그의 자본주의 비판이 고전파 경제학의 두 이론적 기둥, 즉 자본축적이론과 노동가치설에 의해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전파 경제학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산업사회를 정당화시키는 성격의 이론체계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역설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노동가치설(labor theory of value)은 마르크스 이론의 중심 축 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그의 이론체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어떤 상품이 진정한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사용된 노동의 양과 같다는 것이 이 이론의 내용이다. 경제학에서는 무엇에 의해 상품의 가치가 결정되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되어 있는데, 노동가치설은 이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평범한 이론이 어떤 이유로 마르크스의 혁명적 이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자본가에 의한 노동의 착취와 그에 따른 노동자의소외라는 것이 바로 이 노동가치설에 의해 이론적으로 입증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자본가가 일단 노동자를 고용하게 되면 그가 생산해낸 모든 상품은 자본가의 차지가 된다. 노동자는 이렇게 자신이 노동하여 얻은 결과로부터 소외되고, 대신 자본가가 지급하는 임금을 받게 된다. 그가 받는 임금은 노동을 재생산하는 데드는 비용, 다시 말해 생존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의 수준에서 결정된다. (자본주의 체제에는 수많은 잉여노동자가 존재하고 있어 임금을 생존수준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막는다.) 그 결과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해낸 가치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고, 양자의 차이는 이윤으로서 자본가의 소득이 된다. 노동가치설에 의하면 이윤은 기본적으로 자본가가 착취하는 잉여가치(剩餘價値)라는 성격을 갖게 된다.
마르크스 이론의 방대한 체계는 1867년에 제1권이 나온 <자부론(Das Kapital)>에 집대성되어 있다. (제2권과 3권은 그가 죽은 후에야 출판될 수 있었다.) 이 책은 인류의 역사상 성서 다음으로 널리 읽혀진 책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난해하기 그지없는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하면서 읽은 사람이 과연 몇 이나 될지는 잘 알 수 없다. 하여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이렇게 방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그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하다.
마르크스의 개인적 생활은 파란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는 베를린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언론계에 투신하여 신문사 편집인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 신문이 진보적 성향 때문에 당국의 탄압을 받자 파리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 시절 그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한 사람을 사귈 수 있었다. 엥겔스(F. Engels)라는 사업가 겸 아마추어 학자가 바로 그 사람이었는데, 그는 마르크스의 충실한 동지이자 동시에 재정 지원자로서 일생 동안 커다란 힘이 되어주었다. 엥겔스가 없는 마르크스는 거의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돈독했다.
마르크스가 죽은 뒤 <자본론>의 나머지 부분을 맡아 출판한 것도 바로 엥겔스였다.
마르크스는 파리에 살면서도 계속 프로이센을 비판하는 글을 썼기 때문에 프로이센 정부는 프랑스 정부에 그를 추방하라는 압력을 가해왔다.그는 할 수 없이 브뤼셀로 이주해야 했고, 그후 잠시 프로이센으로 돌아가 혁명을 선동하다 쫓기는 몸이 된다. 이제는 파리로 돌아갈 수도 없어 영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는 죽을 때까지 런던의 빈민가에서 살았는데, 언제나 극도의 빈곤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러나 대영박물관에 처박혀서 책과 씨름하는 생활 속에서 마르크스의 이론은 서서히 골격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 어두운 궁핍의 시기가 사실은 학자로서의 그가 완성되어가는 보람된 시기였던 것이다.
시커멓고 넙적한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 수염이 덥수룩한 그의 모습에서 세련된 구석이라고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용모만 세련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생활 자체도 무질서의 연속이었다. 주위 사람의 평에 의하면 그는 몸을 씻고 속옷을 갈아입는 일조차 게을리했다고 한다.
또한 한참을 빈둥거리며 놀다가도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며칠이고 밤을 새워 매달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병으로 세 자녀를 잃고 관을 살 돈 조차 없었던 궁색한 살림 속에서도 돈이 조금 생기면 흥청망청 써버렸다고 한다. 천재의 사생활을 보면 의외로 무질서한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마르크스에서 무질서의 극치를 보게 된다. 그러나 처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남달리 지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사회상을 고려할 때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 분노를 거리의 투쟁으로 발산하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치밀한 분석으로 승화시킨 점에서 학자로서의 위대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연구에 힘입어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체제의 성격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사실이다. 또한 혁명만이 노동자를 그 비참한 상황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는 그의 외침 때문에 좀더 인간적인 자본주의체제를 만들 수 있었던 측면도 있다.
모두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나, 그가 근대사회에 끼친 영향이 지대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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