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어스틴 베블렌(Thorstein Veblen, 1857-1929)
-최초의 미국산 경제학자
오늘날 세계의 경제학계는 미국의 지배하에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경제학의 각 분야에서 미국 경제학자들이 눈부신 활약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미국 경제학계가 세계 패권을 손에 넣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우선 스미스에서 리카도, 그리고 다시 밀로 이어지는 고전파 경제학의 정통 계보는 모두 영국인에 의해 독점되고 있다. 이들의 뒤를 이은 왈라스(L. Walras), 제본스(S. Jevons), 맹거(K. Menger)등의 신고전파 경제학자도 전부 유럽인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만 하더라도 유럽에서 건너온 경제학자들이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어떤 면에서든 미국이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의 실력이지 결코 유구한 전통이 아니다. 따라서 미국 경제학자들도 그들의 뿌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을 터인데, 이런 점에서 베블렌은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유럽으로부터의 수입품이 아닌, 최초의 순수한 미국산 경제학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당시의 미국 경제학계는 독일 유학을 다녀와 역사학파경제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베블렌은 역사학파의 이론과 다른 것은 물론, 신고전파 경제학과도 판이하게 다른 새로운 이론세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그 독창성을 인정받고 있다.
베블렌의 이론을 '제도학파(制度學派, institutionalism)경제학'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경제제도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는 신고전파 경제학이 개인만을 중시한 나머지 사회라는 실체를 무시하고 있음을 비판했다. 경제현상을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경제활동뿐 아니라 그것의 배경이 되는 사회나 경제제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 때문에 제도학파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현대의 경제학자들 중에는 갤브레이스(J. Galvraith)가 이 전통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베블렌의 저서 중에서 오늘날에도 많이 읽히는 것으로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Leisure Class)>이 있다. 이 책은 금전만능의 사회에서 재산의 많고 적음이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사치를 일삼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대로 이를 모방하려고 열심인 세태에 대한 통렬한 고발을 볼 수 있다. 그는 부유한 사람들이 왜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하인을 두어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생활을 하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여가를 바로 성공의 증거로 과시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없음을 보임으로써 자신들의 성공을 과시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이와 같은 그의 지적은 당시의 미국사회뿐 아니라 졸부로 가득 찬 오늘의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경제학자로서도 어느 정도 독특한 면목가 보이지만, 그의 사생활은 그 정도가 특히 더 심해 기상천외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그는 시카고 대학을 위시하여 스탠포드, 미주리 등 여러 대학을 전전하면서 가르쳤는데, 어떤 대학에서든 조교수 위의 직위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여러 대학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괴팍함 때문에 동료들의 호감을 사지 못했던 점도 작용했지만, 사실 그 보다 더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의 여자관계가 워낙 문란하여 심지어 동료교수의 부인까지 유혹하려 했을 정도였다는사실이 따돌림을 받은 결정적인 이유로 알려져 있다. 그가 떠나게 되면 동료교수들이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니 그의 기이한 행동거지가 얼마나 악명을 떨치고 있었는지 능히 짐작이 간다.
교수로서의 그는 강의가 매우 졸렬한 데다가 너무 많은 읽을거리를 숙제로 내주어 학생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C학점보다 더 좋은 학점을 주어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그렇게 한 이유가 또한 걸작이었다. 미국사회에는 각 대학의 우수졸업생들로 구성된 'Phi Beta Kappa'라는 친목단체가 결성되어 있다. 이 단체를 선망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이 많지만, 한편으로는 우등생들이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속물근성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베블렌은 자기의 학생들이 속물들의 모임인 이 단체에 가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좋은 학점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학점이 워낙 좋지 않고서는 그 단체에 가입할 수 없음을 알고 취한 행동이었다. 또한 그는 1924년에 미국경제학회 회장으로 뽑혔지만 끝내 그 직책을 사양하였다. 조그만 감투라도 쓰기 위해 난리를 피워대는 일반적인 세태와는 동떨어진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의 행동거지를 보면 인간으로서의 베블렌에게 결코 높은 점수를 줄 수없다. 더군다나 대학교수라면 당연히 '도덕군자'여야 한다고 믿는 우리 사회의 통념으로 보면 학문이 아무리 갚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 반대로 생각해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즉 그의 개인적인 생활이야 어떻든 간에 학문적 업적은 이것과 별개로 그 자체로서 평가되어야 한다. 그는 경제현상을 잘 이해하려면 우선 그 배경이 되는 제도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독창적인 관점을 제시한 훌륭한 경제학자로 역사에 기록되어야 한다.
-최초의 미국산 경제학자
오늘날 세계의 경제학계는 미국의 지배하에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경제학의 각 분야에서 미국 경제학자들이 눈부신 활약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미국 경제학계가 세계 패권을 손에 넣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우선 스미스에서 리카도, 그리고 다시 밀로 이어지는 고전파 경제학의 정통 계보는 모두 영국인에 의해 독점되고 있다. 이들의 뒤를 이은 왈라스(L. Walras), 제본스(S. Jevons), 맹거(K. Menger)등의 신고전파 경제학자도 전부 유럽인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만 하더라도 유럽에서 건너온 경제학자들이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어떤 면에서든 미국이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의 실력이지 결코 유구한 전통이 아니다. 따라서 미국 경제학자들도 그들의 뿌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을 터인데, 이런 점에서 베블렌은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유럽으로부터의 수입품이 아닌, 최초의 순수한 미국산 경제학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당시의 미국 경제학계는 독일 유학을 다녀와 역사학파경제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베블렌은 역사학파의 이론과 다른 것은 물론, 신고전파 경제학과도 판이하게 다른 새로운 이론세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그 독창성을 인정받고 있다.
베블렌의 이론을 '제도학파(制度學派, institutionalism)경제학'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경제제도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는 신고전파 경제학이 개인만을 중시한 나머지 사회라는 실체를 무시하고 있음을 비판했다. 경제현상을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경제활동뿐 아니라 그것의 배경이 되는 사회나 경제제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 때문에 제도학파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현대의 경제학자들 중에는 갤브레이스(J. Galvraith)가 이 전통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베블렌의 저서 중에서 오늘날에도 많이 읽히는 것으로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Leisure Class)>이 있다. 이 책은 금전만능의 사회에서 재산의 많고 적음이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사치를 일삼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대로 이를 모방하려고 열심인 세태에 대한 통렬한 고발을 볼 수 있다. 그는 부유한 사람들이 왜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하인을 두어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생활을 하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여가를 바로 성공의 증거로 과시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없음을 보임으로써 자신들의 성공을 과시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이와 같은 그의 지적은 당시의 미국사회뿐 아니라 졸부로 가득 찬 오늘의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경제학자로서도 어느 정도 독특한 면목가 보이지만, 그의 사생활은 그 정도가 특히 더 심해 기상천외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그는 시카고 대학을 위시하여 스탠포드, 미주리 등 여러 대학을 전전하면서 가르쳤는데, 어떤 대학에서든 조교수 위의 직위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여러 대학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괴팍함 때문에 동료들의 호감을 사지 못했던 점도 작용했지만, 사실 그 보다 더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의 여자관계가 워낙 문란하여 심지어 동료교수의 부인까지 유혹하려 했을 정도였다는사실이 따돌림을 받은 결정적인 이유로 알려져 있다. 그가 떠나게 되면 동료교수들이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니 그의 기이한 행동거지가 얼마나 악명을 떨치고 있었는지 능히 짐작이 간다.
교수로서의 그는 강의가 매우 졸렬한 데다가 너무 많은 읽을거리를 숙제로 내주어 학생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C학점보다 더 좋은 학점을 주어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그렇게 한 이유가 또한 걸작이었다. 미국사회에는 각 대학의 우수졸업생들로 구성된 'Phi Beta Kappa'라는 친목단체가 결성되어 있다. 이 단체를 선망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이 많지만, 한편으로는 우등생들이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속물근성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베블렌은 자기의 학생들이 속물들의 모임인 이 단체에 가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좋은 학점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학점이 워낙 좋지 않고서는 그 단체에 가입할 수 없음을 알고 취한 행동이었다. 또한 그는 1924년에 미국경제학회 회장으로 뽑혔지만 끝내 그 직책을 사양하였다. 조그만 감투라도 쓰기 위해 난리를 피워대는 일반적인 세태와는 동떨어진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의 행동거지를 보면 인간으로서의 베블렌에게 결코 높은 점수를 줄 수없다. 더군다나 대학교수라면 당연히 '도덕군자'여야 한다고 믿는 우리 사회의 통념으로 보면 학문이 아무리 갚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 반대로 생각해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즉 그의 개인적인 생활이야 어떻든 간에 학문적 업적은 이것과 별개로 그 자체로서 평가되어야 한다. 그는 경제현상을 잘 이해하려면 우선 그 배경이 되는 제도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독창적인 관점을 제시한 훌륭한 경제학자로 역사에 기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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