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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경제인]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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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 경제학에만 매달릴 수 없었던 천재

요즈음 아이들은 '공부하라'는 말이 제일 듣기 싫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대학입시 하나에 모든 것을 거는 집단 히스테리가 만연한 우리 사회인지라, 오죽하면 그런 반응이 나오겠느냐고 동정이 가기는 한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밀이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를 안다면 부모님이 공부하라는 잔소리 정도 한다고 해서 감히 불평을 늘어놓지는 못할 것이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밀(James Mill)은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였는데, 자식에 대한 욕심이 우리네 부모보다 한술 더 뜬 경지였던 것 같다. 그는 걸음마를 간신히 배운 정도의 어린 밀에게 장난감 대신 그리스의 고전을 주고 읽으라 할 정도로 극성 스러럽게 교육을 시켰다.

좀더 구체적으로 그 극성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아버지 제임스는 아들이 세 살 되던 때부터 벌써 그리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밀이 여덟 살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플라톤이나 디오게네스 등의 고전을 두루 섭렵하였고, 이제는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할 단계에 있었다. 여덟 살에서 열두 살까지의 기간 동안 집에 있는 거의 모든 책을 다 읽었으며, 미적분학과 기하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열세 살의 나이에는 정치경제에 관한 책을 전부 독파하여 후일 경제학자가 될 기본 교육을 모두 마친 셈이었다. 리카도와 절친한 사이인 아버지 제임스는 아들과 산보를 하며 열 네 살의 어린 아들에게 리카도의 경제학 강의를 하였다고 한다.

밀은 나중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나는 소년인 적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언제나 고전에만 매달려야 했던 그는 자기 나이 또래의 친구를 사귀어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어린 그가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친구들인 학자나 사회 저명인사들뿐이었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비인간적으로 혹독한 교육을 받고 자랐으면서도 탈선하거나 정신쇠약에 걸리l지 않고 위대한 학자로 성장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요즈음 우리 사회의 아이들처럼 공부하라는 말 듣기 싫다고 가출하거나 시험결과가 걱정스럽다고 투신할 정도로 심약한 사람이라면, 그런 가혹한 환경에서 몸과 마음이 다같이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 분명하다.

아닌게 아니라 그도 스무 살을 넘기면서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우수에 젖어들기 시작하였다. 때로는 자살을 생각해보기도 했다고 한다. 방황하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구원자가 나타났는데, 해리엇 테일러(Harriet Taylor)라는 여자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밀은 그 여인과의 교우에서 많은 위안을 받았고, 삶의 의미를 새로이 찾을 수 있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그 여인이 아이가지 딸린 유부녀였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틈만 있으면 서로 만나고, 편지를 쓰고, 같이 여행까지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런 정신적 사랑을 무려 20년을 넘는 기간 동안-정확히 말해 1830년부터 51년까지-계속했다는데, 이것은 아마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 아닌가 싶다. 그녀의 남편이 죽고 두 사람이 정식으로 결혼함으로써 이 긴 사랑의 여정은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다재다능한 밀은 경제학뿐 아니라 철학과 정치학 등 광범한 분야에 걸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경제학자로서의 밀을 평가해보자면, 경제학과 자본주의의 윤리적 기초에 관한 철학적 성찰을 중요한 업적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그는 벤담(J. Bentham)의 공리주의 철학에 심취하여 이를 경제적 문제에 적용하는데 큰 열성을 보였다. 그 유명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이라는 경구가 의미하듯, 공리주의 철학이란 사람들의 행복을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하는 것이 바로 선(善)이라고 보는 사조를 말한다. 밀은 조세나 교육 같은 사회제도의 개혁에 이 공리주의의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밀에서 시작된 이 믿음은 현대의 경제학으로도 이어져, 오늘날의 경제학자는 어떤 의미에서 거의 모두가 공리주의자라고 해도 좋을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스미스에서 시작된 고전파 경제학(classical economics)은 리카도를 거쳐 밀에 이르러 확고한 기초를 갖추게 되었다. 밀이 1848년에 출판한 <정치를 집대성한 책으로서 고전파 경제학의 징수를 담고 있었다. 이 책은 출판 직후부터 놀랄 만큼 좋은 반응을 얻어 그의 생전에만도 무려 일곱 번이나 판을 바꾸어서 찍었을 정도다.

이 책의 출판과 더불어 밀은 학계로부터 리카도의 후계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워낙 여러 방면에 능통한 천재인지라 경제학에서의 공헌은 그 이전의 스미스나 리카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희미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아무리 천재라 한들 그렇게 여러 방면으로 생각하고 글을 쓰다 보면 한 분야에서의 공헌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위대한 경제학자의 반열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고전파 경제학의 이론적 토대를 완성한 그에게 '명실상부한 당대 경제학계의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보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인간으로서의 그를 말한다면, 그토록 가혹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도 중간에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버틴 정신력의 승리를 높이 사주어야 한다. 그의 인간승리에 대해 우리 모두 아낌없는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