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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공적자금에 대하여

자평소 제가 기사를 통해 공적자금을 추가 조성해야 한다고 여러 번 주장했었는데, 오늘은 그 이유와 조성 규모 등을 좀더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 공적자금이 필요한 이유

IMF 위기이후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금융기관들이 부실채권의 누적으로 예금을 받고 대출하는 등의 기본적인 영업행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금융의 대들보 역할을 하는 은행들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전체금융시장은 물론 실물경제까지도 와해될 우려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공적자금의 투입은 물이 급속하게 빠져나가는 펌프를 되살리기 위한 응급조치였습니다.

어릴 때 물 빠진 펌프를 되살리던 기억이 나십니까? 한 사람은 바가지로 물을 부으면서 다른 한 사람은 열심히 펌프질을 해야 합니다. 이 때 호흡이 잘 안 맞거나 물이 모자라면 헛펌프질만 하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지난 2년반 동안의 구조조정의 결과는 물을 조금 아끼려다 물이 채 올라오지 못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보다 과감하고 신속하게 물(=공적자금)을 더 부어 넣으면서 펌프질(=구조조정)을 해야 펌프(=금융시장)가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64조원의 공적자금 조성 시 밝혀진 부실채권은 118조원이었습니다. 당시에도 그 정도로는 모자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그 후에도 대우를 비롯한 추가부실이 대거 발생, 금융권이 더 이상 부실을 처리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이에 따라 금융시장에서 돈이 잘 돌지 않는 신용경색현상 등 금융불안이 더 심화되고 있습니다. 우리 경제과학부가 7월초 실시한 여론조사(7.3자 본지기사 참조)에서도 고위 공무원을 포함한 경제전문가 90%이상이 공적자금의 추가조성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습니다.

◆ 공적자금의 추가조성 규모

공적자금의 추가 조성 시 첫 번째 문제는 얼마가 더 필요하냐입니다. 물론 국회 동의 등 법적 절차를 밟는 것이 우선이지만 이도 정부가 얼마나 설득력 있는 안을 내놓느냐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이번 기회에 정부는 기업 및 금융권의 추가 및 잠재부실이 얼마라는 것을 보다 투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그래야 추가조성규모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간 실추된 정부의 신뢰도 상당부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부는 6월말을 전후해 은행, 종금 및 투신사의 추가부실 규모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국내외 기관들이 실제 부실규모가 정부발표보다 훨씬 더 크다는 주장을 내놓는 것을 보면 시장과 정부간의 불신의 골이 깊은 것 같습니다. 최근 정부가 워크아웃기업을 보다 과감하게 퇴출 해 나가겠다고 했지만, 그 외에도 화의 및 법정관리중인 기업에 대해 보다 과감한 조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업 및 금융권의 부실규모가 정확하게 밝혀지고, 시장도 믿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공적자금의 추가조성규모는 차제에 보다 여유있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이유로 다음 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 IMF 위기 초(97.12.3) 우리는 사상 최대규모인 총 570억달러를 지원 받기로 했습니다. IMF, 세계은행 및 ADB(아시아개발은행)가 350억달러를 우선 지원하고, 미·일 등 주요선진국이 제2선으로(the second line of credit) 220억달러를 지원키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전히 만기연장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외환보유고가 거의 바닥에 달하자, 미재무부는 97.12.24일 선진국들이 지원 예정인 제2선 자금을 필요할 경우 80억달러까지 조기 지원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동시에 미국은 호주 등 5개국이 추가로 13억 5000만달러를 지원토록 끌어 들였습니다. 이후 시장은 극적으로 안정되면서 우리 경제는 위기를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추가적 80억달러는 선언적 의미(announcement effect=공시효과)였을 뿐 사후적으로 우리가 빌려 쓰려고 한 적도 없는 미국의 전략적 성공작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제가 한국은행 워싱턴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으면서 현장에서 보고 느낀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아이들 많은 집에 먹을 것이 모자란 듯하면 더 배고프다고 아예 먹을 것을 많이 준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없는 집에서 항상 그러기가 힘들겠지만 공적자금은 자주 일어나는 경우가 아닙니다. 더욱이 음식은 먹고 남으면 처치곤란이지만 공적자금은 쓰다 남으면 다시 국고로 환수하면 됩니다. 또 미국이 80억달러를 추가적으로 대기시켰다고 해서 쓰지도 않을 돈을 괜히 조성했다는 비판은 아직껏 들은 적이 없습니다.

주제를 벗어난 이야기입니다만 신용경색현상의 해소를 위해 정부가 채권투자펀드규모를 10조원을 조성하겠다고 했을 때 제가 20조원 이상으로 대폭 늘리라고 주장했습니다(본지 6.24자 기사 참조). 만기가 돌아오는 채권규모도 감안한 것이지만 더 큰 이유는 시장에 미치는 심리적 효과를 노린 것이었습니다.

이상의 논의를 감안해 제가 생각하는 공적자금 추가조성규모는 적어도 50조원 이상입니다. 지금까지 정부는 앞으로 30조원의 추가적인 공적자금이 필요하며 이중 올해 20조원, 내년 10조원인데 기존 공적자금으로부터의 회수자금으로 충당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다 최근 국회 답변 등에서 필요한 경우 추가적인 조성을 추진하겠다고 한 발 물러나고 있습니다. 물론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정책도 변해야겠지만, 펌프에 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이랬다 저랬다 하는 정부를 누가 믿겠습니까?

◆ 공적자금의 사용방안 - 공적자금운용위원회의 설치

다음으로 더 큰 문제는 공적자금을 추가 조성한다고 하더라도 쓸 수 있는 물은 한정돼 있고 작동치 않는 펌프는 한 두 군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여기 저기 조금씩 붓기보다는 전체적인 계획과 순서를 잘 정해서(in orderly and sequential manners) 해야 합니다. 이에 따라 정부, 기업, 금융기관이 박자를 잘 맞추어 펌프질을 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공적자금의 운용은 정부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집행돼 옴으로써 '마음에 드는 놈 떡 하나 더 주는 격'이라는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이것이 제가 본지 7.24자 기사에서 공적자금운용위원회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입니다.

신설할 위원회는 구성 및 업무처리를 철저하게 '기동성, 전문성, 공정성'위주로 해야 합니다. 어떤 펌프를 살리고 죽일 것인지, 얼마만큼의 물을 부어야 할지, 일단 살아난 펌프의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할 지까지 모두 결정해야 할 기구입니다. 지금까지의 공적자금은 '먼저 많이 받아가는 놈이 임자'였다면 이제부터는 받아 가기도 어렵지만 받아간 후에는 국민의 돈을 쓴 데 따른 여러 가지 책임을 부가시켜야 합니다. 보다 확실한 구조조정은 어떻게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방지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공적자금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저의 기사에 대해 한 독자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공적자금 투입으로 나아진 게 하나도 없는데 국민의 돈만 낭비하는 것은 아니냐?"는 그분의 지적에 공감이었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할 것입니다. IMF를 비롯한 국제금융기구들이 우리나라에 사상 최대의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나섰지만 아시다시피 그리 호락호락하게 빌려준 것은 아닙니다. 엄격한 지원프로그램을 만들어 조건을 제시하면서 지원과 사후감시를 병행했습니다. 그에 따라 성장률이 곤두박질치고 실업자가 180만명을 육박하는 등 온 국민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엄청난 액수에 달하는 남의 돈을 쓰면서 고통을 치르지 않겠다면 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우, 한보, 기아 또는 남미 일부국가가 좋은 예입니다.

이번에는 우리 스스로가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부문이 공정자금의 추가조성 및 운용입니다. 앞으로의 공적자금 운용은 위원회를 구성하든 정부가 직접 하든 기동성과 전문성을 가지는 동시에 공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들도, 국회도, 기업도, 금융시장도 믿고 따를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서로간의 신뢰입니다. '신뢰가 살아야 금융이 살고, 금융이 살아야 경제가 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