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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동남아 금융가 심상찮다

환율 폭락에 증시 자금이탈 등으로 ‘제2의 경제위기’ 전조설 모락모락

아시아 경제위기가 발생한 지 꼭 3년째가 되는 7월로 들어서자마자 타이와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들의 외환시장이 일제히 요동치고 있다. 이들 국가의 환율은 폭락을 거듭해 이미 심리적 저지선을 붕괴시켰고, 통화가치는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던 3년 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제2의 경제위기가 오는가”라는 우려와 “벌써 그때를 잊었나” 하는 질타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상황이 가장 심각한 곳은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가치가 지난 7월5일 하룻만에 4%나 떨어져 달러당 9천선을 넘어선 뒤, 9500선을 넘나드는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다. 9500선이 붕괴된 것은 21개월 만이다. 통화가치는 연초에 비해 무려 25%나 폭락했고, 압두라만 와히드 대통령의 취임 당시와 비교하면 35% 이상 떨어졌다. 1만선 붕괴가 시간문제라는 한숨섞인 전망이 끊이지 않는다.


인도네시아 루피화 하루에 4% 폭락


타이 바트화의 환율은 10개월 만의 최저치를 기록하면서 달러당 40바트를 넘어선 상태이며, 필리핀의 페소화도 한때 달러당 45페소를 돌파해 30개월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통화가치 하락에 따른 증시 자금이탈 현상도 두드러져 외환시장과 주식시장이 함께 몸살을 앓는 중이다. 연초에 비해 방콕 증시 -33.75%, 자카르타 증시 -25.57%, 마닐라 증시 -28.34%가 뒷걸음질쳤다. 통화가치 하락분까지 포함하면 인도네시아 주식값은 달러 기준으로 이미 반토막이 난 셈이다.

이런 외형적 양상만 보면 3년 전과 별 차이가 없다. 그 당시 위기의 진원지가 타이였던 반면 이번에는 인도네시아가 바통을 넘겨받은 듯한 인상을 준다. 바트화와 페소화는 ‘도맷금’으로 넘어가 외국인들의 아시아 통화 매도바람에 지나치게 희생당한 측면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환율 급락은 이들 국가의 내부개혁 부진과 최근 고조된 정치적 불안에 따른 외국자본의 급속한 이탈에서 비롯했다. 외국투자자들은 역외시장에서 루피아화를 마구 내다팔아 루피아화 거래규모가 평소 100만∼200만달러에서 최근 1억∼2억달러로 크게 늘었고, 바트화와 페소화 팔아치우기도 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급증했다.


특히 루피아를 주저앉힌 ‘주범’인 인도네시아의 정국불안은 거의 위험수위로 치닫고 있다. 지난 4일 검찰청사 폭발사건을 비롯해 와히드 대통령과 의회의 정면대립, 수하르토 전 대통령 일가 부패혐의 수사 지연에 따른 대학생 시위, 와히드 측근이 연루된 새 정부 부정부패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일부 지역의 분리독립운동과 종족·종교갈등에 따른 분쟁도 악화일로를 걷는 등 총체적 난국에서 민심이반은 가속화하고 와히드는 무기력증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아무리 외환위기가 심각해지더라도 다음달로 예정된 최고헌법기구인 국민협의회(MPR)가 끝날 때까지는 아무런 대책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많다.

타이에선 지난달 야당의원들이 조기총선을 요구하며 집단 사퇴서를 제출해놓은 상태다. 군소정당 난립으로 만성적 정국불안에 시달렸던 타이는 추안 릭파이 총리를 구심점으로 위기극복체제를 유지해나가는 듯했으나, 또다시 고질병이 도지고 말았다. 필리핀 역시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 측근의 비리연루 의혹이 최대 정치불안 요소로 작용하고 있고, 에스트라다의 강공책에 자극받은 이슬람 반군단체의 외국인 인질사건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불안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정치적 불안이 발단… 기초여건은 안정적

이처럼 정치적 불안이 직접적 도화선이 됐다는 점이 97년 아시아 위기 때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때문에 지금의 통화불안이 제2의 아시아 위기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이 지배적이다. 과도한 외채와, 아시아 국가들의 허약한 외환시장을 겨냥한 투기자본의 집중공세가 맞물렸던 당시와 비교해보면 이미 각국 정부의 경각심이 높아졌고, 상당한 감시·대응장치도 갖췄으며, 투기자본의 위세도 매우 약화된 상태다.

무엇보다 이들 국가의 무역수지, 경제성장, 물가, 외환보유고 등 경제 기초여건에는 그다지 큰 문제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분석이다.

인도네시아의 5월 무역수지 흑자는 24.7억달러도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8% 늘어났고, 6월 물가상승률은 지난달에 비해 0.5% 오른 데 그쳤다. 타이도 자동차와 부품, 반도체 등의 호조로 수출이 지난해에 비해 6.1% 늘었고, 올해 5%대의 성장을 기대하고 있다. 필리핀은 이번 1/4분기 3.4%의 성장을 이룩했고, 같은 기간 물가는 12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그렇지만 점점 늘어나는 외채 유입이 또다시 과거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금융정보회사인 ‘톰슨 파이낸셜 시큐리티스 데이터’에 따르면 아시아 지역에 대한 신디케이트론이 올 상반기에 934억달러에 이르렀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97%나 늘어난 규모다. 아시아 기업들은 투자자금 확보를 위해 이자가 낮은 해외자금 조달을 선호하고 있고, 다국적 은행들은 리스크 감소 차원에서 차관단을 구성해 대규모 대출에 나서는 것이다.

올해 들어 계속된 주식시장 위축과 외국인투자 감소는 이들 국가의 외채 의존도를 더욱 높여주며, 부실 금융기관과 기업 정리에 따른 막대한 자금 소요로 공공부채도 급증하고 있다. 타이에선 지난 1∼4월 줄어든 외국인 투자잔액이 지난해 연간 감소액의 7배인 210억바트에 이르렀고, 인도네시아는 97년 월평균 30억달러 수준이던 외국인투자가 지금은 5억달러에도 못 미친다. 공공부채가 극심한 인도네시아에선 외환위기 이전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23% 정도였던 부채가 현재 90%를 넘어섰고, 정부 수입의 절반을 이자지불에 쓰는 형편이다.

여기에 지지부진한 내부개혁은 경제회복의 뒷덜미를 잡고 있다. 이들의 금융기관·기업 구조조정이 얼마나 힘겹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우리나라 상황에 빗대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느슨한 통치력에 만연한 부패, 동남아 특유의 ‘봐주기’ 문화, 정비 안 된 법적·제도적 장치 등으로 ‘밑빠진 기업에 돈쏟아붓기’가 되풀이되고 천문학적 규모의 빚덩어리가 차례로 국민 부담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위크>는 최근호에서 이들 국가가 지난 2년 동안의 빠른 회복세에 취해 쓰라렸던 위기의 교훈을 잊어버렸다고 꼬집었다.

그나마 지금은 세계경제가 순조로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 사태가 그다지 급격히 악화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미국의 추가 금리인상 또는 일본의 제로금리 포기 등으로 자금유출이 가속화할 여지가 적지 않다. 반대로 미국경기가 예상 이상으로 둔화돼 이들 국가의 대미수출이 격감하고 무역수지가 악화되는 상황도 우려된다. 한마디로 세계경제가 다시금 요동치게 되면 곪은 데를 도려내지 못한 채 외국빚에 기대 현상유지에 급급해온 동남아 국가들이 첫 번째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건가


외환시장이 급속히 무너지면 정부가 무작정 개입에 나설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환율방어를 위해 금리를 올리게 되면 국내 자금시장이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금융기관과 기업의 도산 도미노, 실업양산과 국내소비 위축으로 이어지는 위기상황이 또 한 차례 닥칠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것이다. 일부에선 루피아화를 지탱하기 위해 일시적인 채무 모라토리엄(지불유예) 등의 과감한 조처가 필요하다는 의견마저 나오고 있다.

얼마 전 동아시아 경제회복에 관한 보고서를 낸 세계은행의 선임연구원 리처드 뉴파머는 “지금으로선 그 가능성이 매우 낮지만 만약 제2의 위기가 발생하면 그 결과는 끔찍할 것”이라며 각국 정부의 과감한 개혁과 외채 감축을 강력히 권고했다.

동남아 국가들이 또다시 위기상황으로 빠져든다 하더라도 그 불똥이 한국까지 튈 것인지에 대해선 낙관적 관측이 상당히 우세한 편이다. 한국은 외채구조나 외환보유 규모, 그 밖의 기초여건에서 이들보다 훨씬 견실하다. 더욱이 한국은 경제성장과 외국자본 투자의 핵심고리 구실을 하는 정보통신분야를 중심으로 발빠르게 산업재편을 하고 있다. 경제체질 자체가 달라지는 셈이어서 앞으로 이들 동남아 국가들과는 확실한 차별화 현상을 나타낼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한겨레21 200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