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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테마진단] 시장친화적 재벌개혁과 현대의 교훈

정부는 기업·금융부문의 잠재부실 처리 등 당면한 구조조정 현안을 조속히 마무리짓고 내년 말까지 시장경제원리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도 록 각종 제도를 정비한다는 게 기본방침이다.
이는 정부주도에서 `시장의 힘'에 의한 구조개혁으로의 전환을 의미 하는 것으로, 재벌정책의 기조도 보다 시장친화적으로 변화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IMF위기 이후 급진적인 재벌정책이 시행될 수 있었던 데에는 `재벌 의 위기책임론'이 대세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는 위기상황을 원군삼아 압축성장에 비견되는 `압축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주도의 압축개혁은 개혁을 실질화시키는 데 실패함으로써 개혁의 피로를 가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개혁과정에서 정부의 개입 즉 관치(官治)를 오히려 증가시켰다.

따라서 개혁의 피로를 덜고 정부의 개입이 더 이상 타성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경제제도와 유인구조를 개선하고 시장의 힘에 의해 재 벌을 개혁해야 한다.

이같은 관점에서 최근의 현대사태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 다.

현대사태의 발단은 유동성 위기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자금시장의 왜곡이 현대의 유동성 위기를 부추겼기 때문에 일시적인 위기로도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현대그룹의 결합재무제표가 발표되면서 시장의 신뢰가 급격히 저하되었다.

즉 내부거래와 금융부문을 뺀 현대의 매출은 65조인데 부 채가 60조나 되어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갚지 못하는 수익창출능력의 취약성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그룹의 유동성 위기는 `구조적'인 것으로 시장에 비춰지게 되었다.

따라서 관건은 부채를 줄이고 현금흐름을 보강할 수 있는 실 천가능한 자금조달계획을 채권단과 머리를 맞대고 강구하여 시장의 신 뢰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3부자 동반퇴진'이라는 희대의 자구안이 돌출되 기에 이르렀고, 정부와 채권단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장' 운운하면서 3 부자를 비롯한 가신그룹의 퇴진과 계열분리 요구로서 현대를 압박하였 다.

냉정히 볼 때 이같은 요구는 유동성 위기 해소 그 자체와는 무관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현대사태가 그런대로 봉합된 것은 무엇보다 현 대의 자금조달 자구안이 과거 기아, 대우와 달리 실현가능성 면에서 시장의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다.

유동성 위기에서 비롯된 시장의 불신은 유동성 문제에 초점을 맞춰 푸는 것이 순리임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자구계획을 실행하는 과정 에서 현대자동차가 계열분리되고 현대건설과 상선간의 지분이 정리되 어, 부분적이나마 현대그룹의 구조개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결국 현대를 움직이게 한 것은 지배주주가 책임지고 유동성 위기를 자력으로 해결 못하면 퇴출될 수밖에 없다는 시장의 압력인 것이다.

이처럼 시장원리의 존중이 가장 합리적인 현대해법임에도 불구하고 위 기의 본질에서 벗어난 정부와 현대의 힘겨루기는, 군집적 행동으로 인 해 자기충족적 위기실현이 가능한 시장을 대상으로 위험천만한 신뢰의 게임을 벌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결과 현대와 무관한 많은 중견기업의 자금조달이 어려워져 구조조 정이 지체되는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였던 것이다.

"시장을 외면한 기 업은 살아남을 수 없다"라는 정부의 현대에 대한 포고에서 시장은 사 실상 `정부'였다.

시장의 힘에 의한 재벌개혁은 어딘지 모르게 재벌개혁을 방기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시장은 경쟁규율과 법치를 의미하기 때문에 정부 의 재량적 규율보다 더욱 엄정하며, 또한 그 힘이 이해관계자에게 중 립적으로 작용하므로 재벌개혁을 둘러싼 이익집단의 저항을 체계적으 로 차단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시장친화적 재벌개혁은 재벌의 시장순응적 진화를 포괄 할 수 있다.

기업조직은 여건변화에 자기합리적으로 반응하는 유기체 이므로 재벌진화의 경로의존성을 인정하면 재벌의 진로에는 다양한 가 능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시장을 통한 생존 테스트(survival game)에서 살아남은 지배 구조와 기업조직을 승자(勝者)로 인정하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우리 의 정책관행은 아직도 `오너 대 전문경영', `선단 대 독립경영'식의 이 분법적 흑백논리로서 정형화된 재벌개혁의 모범답안을 잣대로 삼는 경 직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재벌의 지배구조개선을 위한 냉철 한 논리구성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황제경영, 가신그룹 등의 대중주 의적 접근에서 자유롭지도 못하다.

시장친화적 재벌개혁을 위해서 정부는 시장원리에 충실한 경제운용을 통해 정책의 예측가능성을 높이고 한편으론 재벌의 책임경영을 제도화 해 시장의 경쟁규율 메카니즘이 실질적으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개혁주체와 개혁대상으로서의 정부와 재벌의 대립구도 는 `자율개혁'과 `개혁산파'의 생산적 관계로 전환하여야 한다.

이로써 우리 자본주의 체제의 건전성과 안정성이 제고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