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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지식경제팀으로 개각"에 대한 소회

신문에 의하면 청와대 어느 고위관리는 정초 개각에 있어서 "과거 계획경제시대의 경제관료에서 세계화. 시장. 국제금융. 지식정보화에 맞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지식경제팀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하였다 한다. 여기서 말하는 소위 계획경제시대에 정부에서 일했던 사람으로써 일견 그럴듯한 말처럼 보이는 이 말에 함축된 의미를 곱씹어 본다. 개각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고 이 정부에 있지않는 사람으로써 쓸데 없는 토를 달자는 것이 아니고, 요즈음 일 잘못한 사람의 표상처럼 취급되는 지난 날의 경제관료 들의 입장에서 몇가지 소회를 말하고자 한다. 물론 이 글의 취지가 이 정부에서 과거 경제관료 들을 알아달라고 하는 말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최근 10여년 사이에 관료사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극에 달한 느낌이다. 관료사회의 경직성, 부패성 그리고 관 우선적 사고 등 세계화 시대에 맞지않는 잔재들이 지탄 받아야 하고,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할 부문임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이 제대로 되지않을 때 무조건하고 관료사회가 우선 매도되는 묘한 분위기가 10여년 사이에 일어나고 있음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과거 일제시대나 독재정치시대에 민을 억압하는 개념의 관료사회의 개념과 지금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관료사회의 서비스 질이 나쁨을 지탄 받을 수는 있어도 이들이 말하는 계획경제 시대에 일을 했으니까 무식하다거나 요즈음 시대에 필요로 하는 전문성이 없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다.


계획경제라는 말은 경제발전사에서 아마도 개발년대를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경제발전 초기 어느 나라나 어느 체제던 소위 개발년대를 갖게 마련이다. 이 시기에는 시장 발달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 기술. 정보 등이 정부 즉 관료사회에 의해 전수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발전이 정부주도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와 같이 후참자의 입장에 있는 나라들은 더욱 그렇다. 2차대전 이후 이런 나라를 돕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세계은행 아닌가? 긴 설명이 필요없이 우리나라가 바로 그 예이고 또 발전의 모범국으로 평가되었다. 이 발전과정에서의 관료사회는 경제발전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였고, 또 사회에 대한 기여는 대단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시장경제 운영을 기본으로하는 정책추진 과정에서 관료사회의 시행착오와 비능률에 대한 비판이 많이 생겨나고 관료사회가 이를 잘 수용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큰 흐름으로 볼 때 경제운영에 있어서 관료사회의 기여는 국민의 칭찬을 받을 대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매도의 대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세상은 옳게 지적한대로 세계화. 시장. 기술 정보 등으로 대표된다. 이를 일컬어 신경제. 지식경영 하는 말이 생겨났다. "지식경제팀"이라는 말이 그런 뜻이라면 이런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국가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개념의 부류에 반대개념으로서 관료사회를 지칭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즉 구경제. 비지식. 비기술 등으로 관료사회를 매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정부 들어 경제관료 출신 장관이 잘 못했다면 이것은 그 사람 개인의 능력의 문제이고 또 그런 사람을 선택한 이 정부의 잘못이지 그 각료가 계획경제 시대에 일했었으니까 무식하고 무능하다고 전체 관료사회를 비판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지식경제팀으로 구성될 사람들의 전문성을 따져보자. 전문가 집단이 갑자기 수입되는 것도 아니고, 또 개인의 전문성이 전체 정책운용을 좌지우지할 시대도 아니다. 경제정책은 팀 플레이를 강조한다. 여기에 어느 각료 또는 특정인의 전문성에 크게 의존되기에는 우리 경제가 보다 복잡하고 성숙되어있다. 또 각료가 특정분야에 특별한 전문성이 있다 한들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관료집단인데 관료집단의 전문성은 관료사회를 무력화 시키고 매도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지금 경제운영은 추진중인 소위 경제개혁과제를 하루 속히 마무리 할 수 있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혁은 "새롭게 뜯어 고치는 것"이라고 했다. 새롭게 고치지 못하고 과거 것이라고 해서 부정만 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는 창조가 전제될 때 파괴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창조 즉 새롭게 일으켜 세우지 못하는 파괴는 파괴일 뿐이다. 경제구조의 개혁은 관료집단이 전문성을 바탕으로 창조성과 활력이 전제될 때 가능한 것이다.


관료사회의 부패성. 경직성. 폐쇄성 등은 사회가 지탄하고 막아가자. 그러나 소위 아시아적 가치를 믿던 믿지않던 우리사회는 관료사회를 무력화 시켜 가서는 않된다. 관료사회는 경제발전을 이끌어 갈 여러 생산요소들 중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 오히려 이들을 북돋아주고 신바람나서 일 할 맛 나는 분위기를 우리 사회가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자긍심을 붇돋아 주어야 한다. 화난다고 찔러대는 이웃 집 호박이 아니다. 그렇다고 경제각료가 반드시 관료사회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은 더욱 아니다. 다만 잘못된 것의 표상으로서 과거 개발년대에 일했던 경제관료가 취급되어서는 곤란하고, 따라서 개발년대에 일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말하는 지식경제(?)의 전문성이 없다는 역차별은 말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