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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현대그룹 사태 전말 뒷 얘기

사실상 현대그룹 해체로까지 번진 현대건설 문제는 지난달 20일을 전후한 시점에 시작됐습니다. 당시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은 정부 고위 인사(구체적인 이름을 밝힐 수 없어 익명으로 처리합니다. 이 점 양해해 주십시오)를 찾아갔습니다.

당시 현대건설은 4월 이후 5월 중순까지 불과 한 달 반 동안 CP(기업어음)과 회사채 만기연장이 제대로 안되면서 무려 6400억 원을 고스란히 금융권에 회수 당했습니다. 현대건설은 현대그룹의 모회사나 마찬가지로 많은 부동산과 유가증권을 갖고 있어 무슨 문제냐고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많은 그룹과 기업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금시장에서 한번 상황이 나쁘다고 소문이 번지면, 금융기관들은 맡겼던 또는 꿔줬던 돈을 마구잡이식으로 되찾아가기 일쑤입니다. 매일 만기가 돌아오는 자금만 적게는 수 백억 원, 많게는 수 천억 원을 오르내리는 대기업으로서는 만기를 연장시키지 않고 매일 이를 모두 갚아나가기란 불가능합니다.

과거 잘 나가던 현대건설이 어려움에 직면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거두절미하고 김윤규 사장은 상황이 다급해지자 급한 김에 정부 고위인사를 찾아가 사정을 호소했습니다. 김 사장은 현대건설과는 달리 문제가 없었던 현대상선이 지난달 17일 외환은행으로부터 500억 원의 당좌대출한도를 늘린 사실을 알아내고 그렇다면 현대건설도 지원해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김 사장이 만난 고위인사는 대북사업을 하면서 교분을 충분히 쌓았던 사람으로 이 사람을 찾아가면 은행권에 대출협조 요청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쉽게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김 사장은 6월말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CP와 회사채 물량이 5000∼6000억 원 수준이었는데 은행권에서 2000억 원, 한국투신에서 3000억 원 등을 지원해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이 선택은 별로 잘 된 것이 아니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주채권은행(외환은행)을 찾아 조용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을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김 사장이 찾아간 고위인사는 금융권에 협조를 요청하는 동시에 정부부처 고위관계자들에게 사태파악을 지시한 것입니다. 당연히 주요 경제부처에까지 현대건설 문제의 본질이 알려졌고 정부는 이 때부터 현대에 대해 예민한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은 지난달 23일 현대건설에 500억 원의 당좌대출한도를 늘려주면서 한빛·조흥·주택은행과 농협에 협조를 요청했는데 농협은 한도가 거의 찼다는 이유로 거부, 4개 은행이 각각 500억 원씩 당좌대출한도를 늘려주기로 합의하는 선에서 매듭지었습니다.

한투로부터의 3000억 원 지원 건은 갑자기 사장이 바뀌는 바람에 난관에 봉착했는데 2000억 원 지원으로 마무리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한편 정몽헌 현대 회장이 지난달 26일 김경림 외환은행장을 찾은 것은 이 같은 협조에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초 외부에서 만나기로 했다가 정 회장이 직접 찾아가겠다는 뜻을 전해 외환은행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정 회장과 김 행장의 만남은 이 같은 사정으로 비밀스럽게 추진됐지만 일부 언론에서 외환은행이 현대건설에 500억 원을 지원한다는 보도를 하면서 마치 정 회장 이 돈 꾸러 김 행장을 만나러 간 것처럼 비춰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동안 현대문제를 눈여겨보던 정부가 두 사람이 회동할 때 김 행장을 통해 현대 구조조정 문제를 제기키로 한 것입니다.

김 행장은 이날 정 회장을 만나 돈 문제가 아니라 강력한 구조계획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또 제가 알기로는 정주영 명예회장과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 이창식 현대투신 사장의 퇴진을 촉구한다는 정부측 메시지를 전달했다. 특히 그 다음주 월요일 금융시장이 열리기 전인 28일(일)까지 내용을 발표할 것까지 아울러 요청했습니다.

문제는 다음날인 27일 현대증권 주총에서 이익치 회장이 물러나지 않으면서 제기됐습니다. 정부에 반발한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이 사건을 접한 정부는 긴급히 경제장관회의를 소집키로 한 것입니다. 이날 저녁 은행회관에서 경제장관들은 자금시장 안정을 위한 미봉책으로 투신권에 비과세상품을 허용하는 내용과 함께 현대에 대한 메시지를 공식적으로 전달했다. 이 자리에서 이용근 금감위원장과 김경림 행장이 현대문제를 책임지고 처리할 것을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때부터 이용근 금감위원장은 현대에 대한 모든 문제를 일일이 체크하며 발표 때까지 총 지휘에 나섰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 이용근 금감위원장은 김경림 행장을 따로 불러 현대에 대한 강력한 촉구내용을 확인하고 은행이 정부측 요구사항을 철저히 챙길 것을 지시했던 것입니다.

다음날 외환은행측은 현대 계동사옥을 직접 찾아가 현대 측이 제시한 자구계획안을 체크했습니다. 자구계획안에는 현대 전 계열사를 포함한 3조원의 유동성 확보계획이 들어있었으나 은행측은 이것으로는 부족하니 유동성 확보방안을 3~4조원 상당으로 늘릴 것과 함께 정주영 회장퇴진을 명문화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현대 측은 적극 반영하겠다는 뜻을 전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날 저녁 현대 측은 당초 약속했던 것과는 달리 현대건설에서 유가증권, 부동산 매각을 통해 5800억 원 상당을 조달하겠다는 내용만 포함시켰습니다. 서산농장(6800억 원 규모) 매각검토와 투자계획 축소(2조2000억 원)는 당초 안에는 없었던 것으로 일단 이것만으로 여론의 동향을 파악하려 했던 것을 전해졌습니다.

이날 외환은행은 겉으로는 채권단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했지만 골자가 빠진 것에 대해 현대 측에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이후 제시하는 구체 협의안에는 당초 발표키로 한 내용을 반드시 집어넣어 재차 발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29일부터는 외환은행이 유동성 확보방안을 포함한 자구계획내용을 직접 챙기는 한편 정 명예회장 퇴진은 금감위에서 도맡는 형식으로 현대를 압박해 들어갔습니다.

발표 하루전인 30일 오전에는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과 김재수 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의 요청으로 김경림 행장과의 만남이 이뤄졌고 이 자리에서 재차 강도 높은 구조계획안이 필요하다는 데 양측이 공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유동성확보방안 등 구조계획안에는 큰 이견 없이 계수조정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정 명예회장 퇴진문제는 계속 난항을 겪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실 기자들조차 현대 발표문에 정씨 일가 퇴진 문제가 포함될 것인지에 확신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적어도 정부측은 정씨 일가의 퇴진 일정을 제시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따라서 지난달 31일 김재수 본부장의 3부자 퇴진 발표가 있기 직전까지 김경림 행장조차 사실을 접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외환은행도 당초 배포하려 했던 채권은행 입장 내용에 3부자 퇴진에 대한 언급을 위해 재 수정하는 소동을 빚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날 발표시간이 당초 오후 2시에서 4시로 늦춰질 가능성이 제기됐는데 이는 이용근 금감위원장이 갑자기 현대 측에게 발표를 늦추라고 외환은행에 지시한 데 따른 것입니다. 이를 두고 금융계에서는 발표시간에 거의 임박해서 현대 측에서 통보해 준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입장정리에 시간이 필요했던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돌았습니다.

이후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이 반발해 회장직을 계속 수행키로 함에 따라 정씨 일가의 경영권 분쟁이 불거졌지만 정부나 외환은행은 구체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3부자 동시퇴진)을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현대문제로 인해 자금시장이나 주식시장, 외환시장이 침체될 것을 걱정했는데 다행히 시장반응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정부나 채권은행은 정몽구 회장 거취문제가 악재로 작용할 것에 관심을 보였지만 그렇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특별한 액션을 취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아무튼 지난 달 말부터 이 달 초까지 현대문제는 매일매일 긴박하게 돌아갔으며 정부나 채권은행은 이런 상황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모처에서 작업을 추진하며 시장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저는 이번 현대사태를 보면서 과거 대우문제처럼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악화된 상황에서 현대문제가 처리되지 않은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경영일선에서 동반퇴진 하겠다는 충격적인 판단을 한 정주영 명예회장의 결단도 높이 살만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부터라고 봅니다. 갈 길이 먼 현대의 판단은 지금부터가 중요하며 그 판단 하나 하나가 시장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시장은 곧 현대와 다른 기업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으로 되돌아 올 것이며 한국경제의 향배도 갈릴 것이라 믿습니다.

시장이 주목하고 있는 현대문제에 대해 독자 여러분도 깊은 애정을 갖고 잘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현대는 그래도 한국의 대표기업입니다. 잘잘못을 여론이 잡아주고 그 역할을 언론이 대신한다면 현대는 잘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국경제가 제 갈 길을 되찾기를 바라며 이만 마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