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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시장원리와 퇴출제도

저희 회사 유리창 밖으로는 폭이 워낙 좁아서 자동차 두 대가 제대로 지나다니지 못할 정도의 골목이 내다보입니다. 그 골목이 오늘은 더욱 좁아 보입니다. 건축폐기물 수집 트럭 두 대가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늘 손님이 별로 없어 보이던 빈대떡집이 하나 있었는데, 폐업을 했는지 주방기구와 내부의 장식물을 뜯어내어 트럭에 싣고 있습니다. 가게 주인을 생각하면 측은한 마음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의 건재함에 안도의 한숨도 들었습니다.

퇴출의 기능

그 가게가 망한 것은 십중팔구 소비자들이 외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업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는 소비자들에게 싸고 좋은 물건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요. 원가를 절감하고 더 좋은 서비스와 제품을 개발하려면 늘 고민해야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도 해야 하고 또 놀고 싶은 욕구를 참아야 합니다. 그래서 망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기업들이 자신들의 편안함이 아니라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일하게 됩니다. 소비자들의 버림을 받은 기업이 망해야 비로소 노동력과 자본은 소비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쓰이게 됩니다. 기업이 망하는 것을 요즈음은 유식한 말로 '퇴출'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시장과 퇴출

다행히도 시장에서는 대부분의 퇴출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됩니다. 소비자들이 외면 한다는 것은 그 기업의 물건이나 서비스가 팔리지 않음을 뜻합니다. 종업원들 월급도 주고 재료값도 주고 빌린 돈도 갚아야 할텐데 수입이 없으니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소비자가 원하지 않는 기업은 문을 닫기 마련입니다. 자기 돈을 써가면서 취미 삼아 장사를 하는 경우라면 상황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시장경제는 자동적인 과정을 거쳐 노동력과 자본을 소비자들의 욕구를 더 잘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유도해 가는 것입니다.

대기업: 시장퇴출의 예외

조금 전에 제가 대부분이라는 말을 쓴 걸 기억하시죠? 퇴출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기업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대기업들도 소비자의 외면을 받으면 부도가 납니다. 빚을 갚지 못하게 된 것이지요. 가만히 두면 채권자들이 부도가 난 회사의 재산을 차압하고 경매에 부칠 것입니다. 그러면 회사가 망하겠지요.
하지만 대기업의 경우는 정부가 망하게 놔두질 않습니다. 지난 정권에서의 부도유예협약, 이번 정권의 워크아웃, 또 법원을 통한 화의, 법정관리 같은 제도들이 모두 망해야 할 기업의 목숨을 연명해주는 장치들입니다. 어느 정부든 시장경제의 확립을 목표로 내걸고 있지만 기실은 시장경제 질서의 중요한 일부분을 죽여 놓고 있는 셈입니다.

정부 개입의 이유

정부가 부실 대기업의 퇴출에 인위적으로 개입해 온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대량 실업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기업이 망하면 종업원도 해고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에게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가 생긴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퇴출에 따른 실업자의 증가는 일시적 현상일 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망할 기업이 망해 주어야 거기에 묶여 있던 자금과 노동력이 생산성 높은 새로운 기업과 산업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수 있습니다. 조금만 길게 본다면 부실기업의 유연한 퇴출은 오히려 실업을 줄입니다. 같은 돈을 쓰더라도 효율적 기업은 비효율적 기업보다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개혁 이후의 영국과 뉴질랜드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은행의 부실채권 증가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돈을 빌려간 기업이 망하면 빌려준 돈을 못 받게 되거나 또는 일부 밖에는 회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두려워 선뜻 부도를 내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일종의 도덕적 해이 현상입니다. 빚 떼일 것을 두려워해서 부실기업의 부채 상환을 계속 연장해주다가 빚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일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의 주인이 아닌 은행장들로서는 자신의 임기 중에는 부도가 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자신의 재임기간 중에 장부상의 대손(貸損)이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지요. 담당 공무원들도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동안 사회적 파장이 큰 대기업의 부도가 있길 원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장부상의 분류가 어찌 되었건 간에 받기 어려운 대출금은 부실채권입니다. 부도의 파장이 두려워서 퇴출을 미루다보면 부실채권의 규모는 더 늘어납니다. 또 우량기업에 갈 돈이 줄어들어 채권 전체의 질이 낮아지기도 합니다. 부실기업의 과감한 퇴출은 오히려 은행의 부실을 줄이는 좋은 수단입니다.

퇴출 제도의 필요성

물론 퇴출 관련 제도들이 전혀 무용지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제도들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대기업들에는 채권자의 숫자가 매우 많습니다. 부도가 난 후 가만히 내버려둔다면 채권자들은 제각각 담보물들을 회수해 갈 것입니다. 기계장치나 토지, 건물, 특허권, 매출채권 같은 것들이 회수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기업의 가치는 그런 것들 이상입니다. 직장 내 사람들끼리의 관계, 거래처들과의 네트워크, 수십년간 쌓아온 전통 같은 것들이 눈에 보이는 재산들보다 더 중요한 경우들이 많습니다. 채권자들이 개별적으로 채권을 회수해가다 보면 그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재산들은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기 십상입니다. 그 결과 받아야 할 돈을 받지 못하는 채권자들도 많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일단 회사를 살려 놓은 후 두고 두고 빚을 갚게 하는 것이 담보를 잡지 못한 채권자들에게 더 유리할 수가 있습니다. 법정관리나 화의는 그럴 때에 필요한 제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법정관리나 화의 같은 퇴출 지연 제도는 채권자가 입게 될 손해를 최소화하는 데에 본래의 목적이 있습니다.

퇴출 관련 제도와 채권자의 이익

그러나 현실에서는 제도들이 그런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법정관리나 화의를 통해 채권자들이 이익을 본 경우가 몇 건이나 되겠습니까? 오히려 채권자들의 희생을 통해서 기업관계자들이 이익을 취해온 것 아닐까요?
법정관리나 화의는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제도입니다. 특히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멀쩡하던 기업도 부실이 심해지기 마련입니다. 사공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법원이 임명하는 관리인과 기존의 오우너 그리고 노조입니다. 그런데 관리인은 주인이 아닙니다. 당해 기업이 사업을 잘해서 법정관리에서 벗어나면 자리를 잃을 사람입니다. 그러니 자기 일처럼 회사의 일에 열심일 인센티브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오우너도 문제입니다. 지분이 소각되기 때문에 과거의 오우너가 공식적으로 회사의 일에 관여할 수는 없지만, 과거의 인맥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이익을 챙기려고 할 것입니다. 노조는 노조 나름대로 그럴 거구요. 이런 상황에서 기업이 제대로 돌아갈리 없습니다. 자금지원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어 버립니다. 법정관리 기업의 회생율이 낮은 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릅니다.

진정한 퇴출을 위하여

부도가 나면 원칙은 청산이나 매각이어야 합니다. 다만 부도 기업을 살리는 것이 채권회수에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될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청산이나 매각을 지연시키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기업이 부도나면 법정관리로 넘기는 것을 퇴출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법정관리는 퇴출이 아닙니다. 퇴출이란 더 이상 그 기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뜻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실기업이 사용하던 노동력과 자금이 더 효율적인 기업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퇴출 관련 제도들은 채권자를 윽박질러 빚을 탕감해주고 이자를 깎아주어 부실기업의 생명을 연장해주는 제도일 뿐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

마지막으로 은행 문제를 빼놓을 수가 없네요. 부도기업의 처리를 놓고 청산이 좋을지 매각이 좋을지 법정관리로 살려 놓는 것이 좋을지를 결정할 주체는 채권자인 은행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채권회수액 극대화를 추구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우리나라의 은행은 거의 국유화되다 싶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은행이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아무리 채권은행의 자율에 맡긴다고 외쳐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은행 주식을 하루라도 빨리 매각해서 은행을 정치로부터 해방시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