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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대학교육 정책의 방향

교육부의 교육정책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튈지 모르는 럭비공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입시를 대학의 자율에 맡기겠다고 해놓고선 2002학년도부터 대입 본고사를 금지시키지 않나, 학력의 하향평준화를 막기 위해 특수목적고와 일부도시에서 고등학교 입시를 허용하더니 다시 2002학년도부터 분당, 일산을 포함한 수도권 7개 도시의 고교평준화방안을 확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합니다. 먼 장래를 내다보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교육은 나무 심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언젠가 육종전문가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나무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자주 옮겨 심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장소를 잘 선택하여 한번 심어 놓으면 그대로 놔두어야 오래오래 아주 거목으로 자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주 옮겨 심으면 병약하고 잔목으로밖에 자라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지금 교육부가 교육정책을 펴고 있는 것을 보면 마치 나무를 한해는 동쪽에다 심었다가 다음해는 서쪽에다 옮겨 심고, 다시 남쪽으로 옮겼다가 또다시 북쪽으로 옮겨 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나라에서 거목과 같은 세계적인 인재가 안나오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옛날에 아기를 자꾸 만지면 어른들이 아기가 손탄다고 말리시는 것이 기억이 납니다. 아기를 너무 손으로 만져주면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육부가 우리 교육에 너무 손을 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계에서 유례없이 교육열이 높은데 교육의 질은 어째서 떨어지고 있습니까? 여기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입시경쟁과 과외문제는 정부의 입시정책의 변화로 해결되지 않는다

2년 전 김대중 대통령께서 "대학입시제도를 완전히 대학 자율에 맡기겠다"고 하면서 대학자율화의 의지를 강조했을 때 무척 고무적이었습니다. 이제부터 대학과 대학교육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점차 대학이 대학답게 발전할 수 있겠구나하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실무 부서인 교육부에 와서는 정작 그 내용이 매우 빈약했습니다. 소위 "무늬"만 자율이었지 입시제도의 내용을 보면 오히려 더욱 복잡하기만 했습니다.
'수능을 몇 퍼센트 반영하라. 내신을 반영하라. 내신과 수능은 빼고, 추천제 및 봉사 등 다양한 선발기준을 만들어라.' 별 희한한 기준들이 속출하였습니다. 각 대학은 그래도 나름대로 좋은 학생들을 뽑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신성적은 천차만별인 고등학교의 수준을 반영하지 못하니 수능과 본고사에 비중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수능시험이 너무 쉽게 출제되어 변별력을 상실하자 대학은 본고사에 비중을 많이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본고사 마저 금지한 것입니다. 교육부 입장은 본고사를 실시하면 과외가 성행하고 입시가 과열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문제의 근본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치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소위 일류, 이류, 삼류로 구분되는 대학간 서열이 존재합니다. 그 서열이라는 것이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업적의 기준보다는 졸업 후 각 방면에서 보호와 지원을 얼마나 잘 받고 출세할 수 있느냐에 따라 정해져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학력으로 사람을 판정하고 어느 대학 출신이냐를 놓고 사람의 능력을 판정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대학진학 희망자들은 대학에 입학하되 일류 국립대나 아니면 되도록 높은 서열의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됩니다. 자연히 대학입시 경쟁은 치열해질 수밖에 없어진 것이죠. 치열한 입시경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고 할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식을 일류대학에 보내야겠다는 것은 부모의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과외문제는 바로 이러한 구조적 모순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입시정책을 요리조리 바꾼다고 입시경쟁과 과외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경쟁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합니다. 다만 그 경쟁을 생산적인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문제시해야 할 것은 치열한 입시경쟁과 과외문제 자체보다는 이렇게 치열한 경쟁과 많은 비용을 들여가면서 교육에 열을 올리는 데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자랑할만한 대학 하나 없다는 사실과 세계적인 인재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할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학은 기본적으로 학문을 연마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곳입니다. 그로부터 발생하는 전문지식이 결국 사회를 발전시키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듭니다. 학문과 진리 탐구의 활동은 외부의 간섭이 없이 가장 자유스러울 때 발전하고 공고해집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과연 우리 대학들이 외부의 간섭 없이 자유로운 활동을 하고 있는지. 앞에서 언급한 대학입시에 대한 교육부의 간섭만 보아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대학입시에 대한 교육부의 간섭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교육부는 교육과정은 물론 전반적인 학교 및 학사 운영에 대해 일일이 간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이 대학답게 발전하고 세계적인 대학과 인재가 나오기는 꿈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는 교육부가 일일이 간섭하는 바로 그 관치교육에 있습니다. 관치교육은 대학은 물론이고 중고등학교에서 학문적 혁신(academic innovation)을 빼앗아 갑니다. 이것은 결국 대학자체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후진으로 몰아 넣게 됩니다.
사실 정부라는 조직은 권력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관료체제입니다. 관료주의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사회의 생산성을 증가시키는 윈-윈 게임이 아닌 정치력과 권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나눠먹기식 제로썸(zero sum) 게임이며, 장기적으로는 네가티브썸(negative sum) 게임인 것입니다. 정부가 대학교육(또는 교육 전체)에 간섭하고 자신의 이데오르기를 강요할 때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은 이러한 관료주의적 사고방식이 알게 모르게 전파되고 고착화되어 감으로써 권력추구형 인간을 양산한다는 무서운 사실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기보다는 권력을 추구하고 그것에 줄을 대려고 하는데 많은 노력과 자원을 사용하게 되는 사회병리 현상이 만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래가지도 못합니다. 또 그러한 국가는 부강해질 수 없습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교육부도 관치교육이라는 비판이 싫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교육부가 나서서 대학을 특성화시키고, 수요자 중심의 교육을 하는 대학을 육성하겠다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교육에 시장원리를 도입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사이 시장경제, 시장경제 원리가 유행하니 아무 곳이나 붙여서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 시장원리라는 이야기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교육의 주체는 교육의 공급자인 학교와 수요자인 학부모와 학생입니다. 시장원리라는 것은 이 두 주체간에 자발적인 교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교육의 공급자인 학교가 자발적으로 수요자인 학부모와 학생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교육과정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정확한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며, 이것이 바로 시장원리인 것입니다. 제3자인 정부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학부모와 학생들의 욕구를 수용하는 척하는 것이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 아닙니다. 더욱이나 시장원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치교육인 것입니다. 이것을 시장원리요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라고 선전하니 잘 모르는 많은 국민들이 "시장원리"와 "수요자중심의 교육"이라는 말에 반감을 갖는 것입니다.
관치교육을 청산하는 것은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라는 명제 하에 교육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부가 대학교육에 손을 대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교육부가 대학교육에 간섭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대학 발전을 꾀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면 교육부는 대학에서 손을 떼야 할 것입니다.

(2000년 12월 7일 / 경희대학교 경제통상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