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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교육문제의 이상과 현실: 교육은 공공재가 아니다

지난 11일 이돈희 교육부장관의 교사에 관한 발언이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장관께서 현직 교사들을 학원강사에 비유하며 힘주어 이야기한 저의는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사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갖게 하고 스스로 변하는 교사들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신문기사를 보면서 이 장관께서는 오렌지와 사과를 비유하는 우를 범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현직 교사와 학원강사가 처해 있는 조건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학교교사와 학원강사의 비교는 잘못이다

우선 그 전문성에서 교사들은 학원강사들에 견주어 큰 차이를 보입니다. 초등학교 교사들의 경우 해마다 다른 학년을 담임하게 됨으로써 교사 스스로 학년별 전문성을 추구하기 힘듭니다. 중등학교의 경우는 과목별 전임제이므로 조금 낫기는 하지만 여전히 1, 2, 3 학년을 오가며 그 단위학교 전 교과영역을 담당해야 합니다. 게다가 너무나 잦은 교육과정 개편은 교사들이 스스로 전문가가 될 의욕을 잃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학원강사들은 어떠합니까? 같은 내용을 같은 대상에게 반복 강의함으로써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강의 내용을 더 알차게 그 깊이를 더할 수 있습니다. 학원강사들이 수년간 노하우로 자체 개발한 교재를 활용하고 그것이 서점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는 것에 비해 교사들은 교수활동이 지속적이지 못함으로써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지난 1년간 교환교수로 가 있었던 미국 미주리주 한 공립초등학교에서 학교장이 학부모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한 인사 가운데 "난 이 학교에서 6학년만 10년 동안 가르쳤다"는 말이 굉장히 신선하게 들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살펴보니 대개의 교사들이 자기가 지금 맡고 있는 학년을 중등학교의 교과담임처럼 전문화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의 담임이었던 교사는 3학년만 18년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우리 제도는 우리 학교교사들에게 그와 같은, 혹은 학원강사와 같은 전문성을 갖출 기회를 허락하고 있습니까?

둘째는 자율성 부문에서 교사들은 학원강사에 뒤지고 있습니다. 학원강사들은 자율적으로 교재를 개발하고 교수법을 개발하여 학생들의 욕구에 맞추어 변화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교사들은 지나치게 많은 잡무와 공문처리 등으로 직접 학생들을 대하고 가르치는 일에 자율적으로 임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며칠 전 교사들이 학급담임을 기피한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교사들이 얼마나 교수 외 업무에 시달리고 있으면 학급담임을 기피하겠습니까?

셋째는 고용과 직업보장 면에서의 차이라 하겠습니다. 우선 학원은 완벽한 시장 논리로 움직입니다. 조금 더 유능하고 조금 더 좋은 교재를 개발한 학원으로 학생들은 모여들고 그 학생들을 유지하기 위해 학원은 더 유능한 강사를 유치하느라 전전긍긍합니다. 학원강사들은 자연 많은 학생들을 유치하는 강사가 되려고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학교는 어떠합니까? 가만있어도 학생들은 고르게 나뉘어 배치되고 유능, 무능의 기준과 관계없이 또 학생들을 맡아 가르치게 됩니다. 얼마 만에 한번씩 교육부에서 바꾸어주는 교육과정에 따라 달라진 교과서를 가르치면 되는 것입니다. 교사들의 정년도 보장되며 근무평점도 판에 박힌 평점제도로 일관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교교사들에게 학원 강사와 같은 역동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니겠습니까?

학교교육이 진정으로 살아나기를 원한다면 교사들의 안일함을 탓하기 전에 우리 학교에 가해지는 교육부의 간섭의 손을 거두어 들여야 할 것입니다. 교육부 장관께서 바로 표본으로 삼고 있는 학원교육을 보면 그것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학원 교육이 생동감 있고 역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곳에 교육부가 손을 안대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교권의 추락의 책임은 정부 간섭에 있다

저는 며칠 전에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학교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매를 못 들어도 학원강사들은 매를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공부는 학원에서 하고 학교는 건성으로 다닌다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학교와 학교교사들의 권위가 학원과 학원강사들 보다 못하게 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었습니다. 학교 교사들의 권위가 이처럼 땅에 떨어진 근본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한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정부가 교육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정부가 교육에 손을 대면서부터 학교는 하나의 정부 조직이 되어버렸고, 늘 그런 것처럼 학교와 교육부간에 상하관계가 생겨버렸습니다. 그래서 교육부는 상급기관, 학교는 하급기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급기관인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은 상급기관인 교육부관리의 지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툭하면 교육부 관리들은 교사들을 마치 하급직원처럼 다루니, 학생들이 알기를 교사들을 무엇으로 알겠습니까? "하! 선생들이 권력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는구나" "우리 아빠가 고급공무원인데", "우리 삼촌이 누군데" "우리 이모부가 어디에 근무하는데" 그러니 학생들이 교사들을 존경하고 따를 리가 없죠. 학교는 졸업장이 필요하니 마지못해 다니고, 마음에도 없는 학교를 다니니 교사의 말을 안 듣는 것은 고사하고 교사에게 욕설을 퍼붓지 않나 폭행하지를 않나. 참으로 마음이 무겁습니다.

예전에 중학교 다닐 때 들었던 일화가 생각납니다. 서슬 퍼런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 이야기였습니다. 군국주의 시대에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은 군장성 아니겠습니까? 한 장군에게 한 아들이 있었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아버지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어려워하니 이 아이는 자기 아버지가 가장 높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속된 말로 앞에 뵈는 게 없었답니다. 담임선생님 말씀도 잘 안 듣고 말썽만 피웠답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 아이 아버지가 그 담임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했답니다. 그리고 아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한 다음 담임선생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무릎을 꿇고 있었답니다. 여지껏 자기 아버지가 최고로 높은 사람인줄 알았던 그 아이는 놀랐고, 그 다음날부터 그 담임 선생님을 존경하고 선생님의 말씀을 잘 따라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국민 생활에 깊숙이 관여하면 사회의 도덕성이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의아해하실 분도 있겠지만 사실입니다. 정부가 우리 생활에 개입하면 개인 스스로 책임지고 행동하는 영역이 그 만큼 줄어들고 정치적 활동으로부터 얻는 이득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행동에 의한 배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가 아닌 그야말로 권력의 힘에 의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치력에 의해 배분이 된다는 것은 능력이 없지만 정치력을 가지고 있거나 그에 가까운 사람이 능력이 있는 사람보다 더 많이 갖는 것입니다. 여기서 개인과 개인간에 암묵적으로 인정했던 윤리적 관계가 깨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능력이 있어서 많이 가지는 것은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육상경기에서 최고로 빨리 달리는 사람이 1등을 한 것에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자기보다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이 다른 힘에 의해서 더 많은 것을 갖게 되면 사람들 사이에 확립되었던 기존의 신뢰와 관계가 깨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못사는 것은 내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소위 '빽'이 없어서다라고 생각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확산되면 그 사회는 윤리적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 교육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육의 직접적인 관계자들이 아닌 사람들이 학교와 교사들을 이쪽 저쪽에서 동네북처럼 두둘겨 대니 교권이 서지 않는 것입니다. 또 교육계가 냉소주의와 무기력증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교육은 공공재가 아니다

정부가 교육에 손을 대는 것에 대한 피해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유독 교육은 정부가 담당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것은 왜 그러할까요? 그것은 교육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교육은 공공재라는 인식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육은 결코 공공재가 아닙니다. 교육은 어디까지나 사적 재화입니다.

공공재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동시에 소비할 수 있는 불가분성, 한 사람이 소비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소비의 양이 감소하지 않는 비배재성, 한 사람이 소비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소비로부터 얻는 혜택이 줄지 않는 비배타성의 특성을 갖고 있는 재화를 말합니다. 그러나 교육은 이와는 다릅니다. 한 교실에 여러 학생을 놓고 동시에 가르칠 수 있기 때문에 교육에 불가분성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교실에서 질문하던가 아니면 주의를 끌게 되어 그 학생에게 교사가 많은 시간을 사용하게 되면 다른 학생들이 교사의 주의를 끌게 되는 시간이 그 만큼 적어집니다. 불가분성이 없는 것입니다. 또 학생들의 수준은 다양합니다. 우수한 학생이 있고 열등한 학생이 있은 것입니다. 우수한 학생에 맞추어서 교육을 한다면 열등한 학생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육의 혜택을 얻을 수 없고, 반대로 열등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면 우수한 학생이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의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비경합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학생이 자원의 제약으로 컴퓨터 등 다른 교육기회에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비배재성이 없는 것입니다.

또 교육이 인적 생산성을 증가시켜 사회전체의 부를 증가시키고 우리 모두를 잘살게 만드는 외부효과가 있기 때문에 국가가 교육을 담당하거나 보조를 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분명히 잘못되었습니다. 만약 이 주장이 옳다면 교육 이외의 다른 많은 것들에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물적 자본 역시 사회적 부를 증가시킵니다. 그렇다면 정부가 모든 투자를 관장해야 하고 그에 대한 보조를 해주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러한 주장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은 가격이 이미 그것을 생산한 사람에게 그것이 만들어낸 사회적 부를 배분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공장 설립은 우리 사회의 부를 증가시킵니다. 그러나 그 증가한 부의 대부분은 공장 설립에 자본을 댄 투자자에게 돌아갑니다. 마찬가지로 교육을 받음으로써 생산성이 높아진다면 그 결과로 그 사람의 소득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제 교육을 꼭 정부가 담당해야만 한다는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육의 주체인 학교와 교사, 그리고 학생 및 학부모에게 그 결정권을 주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2001년 1월 19일 / 경희대학교 경제통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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