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조 (한성대 경상학부 교수)
1. 서론
한국 경제는 지금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고 있다. 지난 11월 21일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이후 10여일간의 숨막히는 협상과정 끝에 12월 3일 550억 달러의 자금지원 및 이에 따른 가혹한 내용의 구조조정 조건을 담은 양해각서가 체결되었다. 올해 들어서 재벌기업들이 줄줄이 부도가 나고 하루에 40개가 넘는 중소기업들이 도산하더니, 결국 국가경제 전체가 파산하였음을 공식 선언하게 된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IMF는 GATT(현 WTO)와 함께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경제질서를 주도하여 온 국제기구이다. IMF는 구조적인 국제수지 적자로 인해 외환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에게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단 IMF의 구제금융은 그 수혜국의 경제정책과 경제구조에 대한 조정을 강제적인 조건으로 부과하게 되는데(IMF Conditionality), 이것은 구제금융 수혜국의 경제주권이 크게 제약됨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나라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는 나라로서 경제주권을 IMF에 이양하게 되었고, '제2의 국치일'을 맞게 된 셈이다.
한국 경제가 공황(panic) 상황을 맞고 있는 것만큼, 한국의 경제학도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 '조화로운 시장경제질서 하에서는 공황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주류경제학(특히 자유주의 경제학)은 눈 앞의 현실에 침묵할 수밖에 없다. 반면, 시장경제질서의 불안정성 또는 그 모순을 주장하던 비주류경제학(포스트 케인즈학파 또는 맑스경제학)은 구체적 대안의 제시라는 현실의 요구 앞에서는 무력감을 토로할 수밖에 없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현실의 역동성을 파악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기에는 그 틀이 너무나 좁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 특히 이번 위기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분명히 알고 있다.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파동, 한보부도사태 및 김현철 국정개입 의혹, 기아부도사태 및 이를 둘러싼 정계·관계·재계의 음모, 외환·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방치한 정치적 직무유기와 정책적 무능 등 최근 1년동안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 앞에서는 장황한 이론이 필요없다. 즉 금융을 수단으로 하여 정부가 주도하고 재벌이 중심이 되는 경제구조, 이와 연관된 반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정치구조가 바로 위기의 근본 원인이다.
따라서 천민적 재벌경제구조와 부패한 수구정치구조를 근원적으로 혁신하지 않고서는 한국 사회의 미래에는 희망이 있을 수 없다. 더구나 위기의 원인 제공자인 재벌과 정부는 건재한 채 노동자만이 고통을 전담하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이 이루어져서는 새로운 도약은 커녕 작금의 위기로부터 회복될 수도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먼저 IMF의 성격과 그 구제금융의 내용을 살펴보고, 이러한 일반적 논의를 기초로 이번에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된 데 따른 장단기적인 파급효과를 예측해본다. 마지막으로는 최근에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구체적 현실의 문제, 즉 신용공황과 재벌해체의 문제를 노동자·민중의 관점에서 해결하기 위한 대응책을 모색해보기로 한다.
2. IMF와 그 구제금융
(1) IMF의 성격
IMF는 1차 세계대전, 대공황,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사건들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20세기 전반부의 역사적 산물이며,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경제질서를 (GATT(현 WTO)와 함께) 주도하여 온 20세기 후반부의 골격이기도 하다.
국제통화금융질서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2차 세계대전 이전의 20세기 전반부는 세계금본위제도의 붕괴와 각국의 경쟁적 평가절하로 점철된 혼란의 역사이다. 국제통화금융질서의 혼란은 국제무역을 위축시킴으로써 자본축적에 대한 결정적 장애물이 되었다.
이러한 경험에 기초하여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전승국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환율의 안정화, 외환거래의 자유화를 실현하고 그 위에 국제통화금융질서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국제기구를 설립하기로 하였는데, 이것이 1945년 12월 브레튼 우즈 협정에 의해 창설된 IMF(국제통화기금)이다.
IMF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창설 과정에서의 논의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경제질서, 특히 그 중에서도 국제통화금융질서에 대한 구상은 주로 영국과 미국이라는 양 강대국 사이에서 논의되었는데, 그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영국은 전시 중에는 물론 전후의 부흥에도 미국의 대규모 원조를 필요로 하고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 전까지 영국의 파운드화가 누려왔던 전통적 국제통화로서의 기능과 지위만은 최소한 계속 유지하려고 하였다. 반면, 이미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며 생산과 무역의 측면에서도 압도적 우위를 확보하게 된 미국은 스스로 세계경제의 헤게모니적 지위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 미국의 경제력을 감안할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은 오히려 이것이 자기의 책임이라는 자부심까지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이해관계 대립은 IMF의 조직구성에 관한 초안 작성단계에서부터 그대로 표출되어, 1943년 경에는 영국의 케인즈안(Keynes Plan)과 미국의 화이트안(White Plan)이라는 두개의 대조적인 초안이 제출되었다. 이 두 초안은 ① 국제통화의 창출 방식, ② 국제기구의 재원마련 방식, ③ 국제수지 불균형의 조정 책임 소재 등의 쟁점사항에서 극단적인 이견을 보였다.
먼저, 영국의 케인즈안은 ① 금이나 (미국의 달러화로 될 것이 확실시되는) 어떤 한 나라의 화폐가 국제통화의 중심이 되는 체제는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국제통화는 신용화폐 형태로 새롭게 만들어져야 하며, ② 국제기구가 회원국에 금융지원을 하는 데 필요로 하는 재원 역시 회원국의 직접 출자가 아니라 신용창출 형태로 새롭게 공급되어야 하고, ③ 국제수지 불균형을 조정하는 비용은 적자국 뿐만 아니라 흑자국 역시 동등한 비중으로 공동부담하여야 한다는 것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즉 케인즈안은 경제력이 쇠락하고 국제수지 적자가 예상되는 영국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IMF가 케인즈안을 기초로 해서 창설될 가능성은 애초부터 전무하였다. IMF는 이미 압도적인 경제력을 확보한 미국의 입장을 철저하게 반영하는 형태로 창설되었다. 즉 미국의 화이트안이 제시한대로 ① 금 및 (고정된 비율로 금과 교환될 수 있는 유일한 통화인) 미국의 달러화가 국제통화의 중심이 되며, ② 각 회원국의 경제력과 약간의 정치적 요소를 반영하는 비율로 배분된 할당액(Quota)을 회원국이 직접 출자함으로써 재원을 마련하고, ③ 국제수지의 구조적 불균형 및 이에 따른 외환시장 불안정의 조정책임은 국제수지 적자국이 전적으로 국내 긴축정책을 통해 부담하는 형태로 IMF는 조직되었다.
이로써 2차 세계대전 이후 IMF는, 국제무역질서 측면에서의 GATT(현 WTO)와 함께, 국제통화금융질서 측면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확인하고 이를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전후 복구를 통해 서독·프랑스·영국·일본 등 주요 선진국의 경제가 회복되면서 미국의 경제력은 상대적으로 하락하였다. 그 결과 미국의 압도적 경제력을 전제조건으로 하여 출범하였던 브레튼 우즈 체제는 60년대 이후 계속 혼란을 거듭하다가 1971년 8월 미국이 달러화의 금 태환을 정지함으로써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IMF의 구성과 기능에도 적지않은 변화가 야기되었다.
먼저, ① 국제통화로서의 금의 기능을 완전히 정지시키면서 각국의 환율체계는 고정환율제도에 변동환율제도로 이행하였다.
또한 ② 60년대 이후 국제통화금융질서의 불안정성이 점차 확대되는 추세에 대해 회원국들의 출자금으로 마련된 재원만으로는 적절히 대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재원확보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산물이 1969년 IMF협정 개정을 통해 도입된 SDR(Special Drawing Rights; 특별인출권)이다. SDR은 금과의 교환이 인정되지 않고 또 그 창출의 전제조건으로 별도의 준비금(reserve)을 적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국제신용화폐이다.
그러나 SDR을 대량 창출하는 것은 국제유동성을 과잉상태로 만들어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중시킨다는 우려가 제기되었고, 또 창출된 SDR을 회원국간에 어떤 비율로 배분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었기 때문에, SDR은 70년대 몇차례의 증액 이후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SDR은 IMF의 새로운 재원조달 방안으로 크게 기여하지 못하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국제기구의 회계단위로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신 IMF는 여타 국제기구나 각국 중앙은행으로부터의 차관도입에 의해 필요한 재원을 보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IMF의 재원 확대 실적이 지지부진한 데 비해, 외환시장의 혼란을 진정시키는 데 필요한 자금지원 규모는 점점 커져 갔다. 특히 80년대 이후 금융산업의 자유화·국제화 추세에 따라 국제적 투기자금의 규모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그만큼 국제통화금융질서가 붕괴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오늘날에는 국제외환시장의 거래액 중 수출입 등의 경상거래를 결제하기 위한 외환거래 비중은 10%가 채 되지 않으며, 나머지 90% 이상이 모두 단기적 투기거래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회원국의 외환시장에 위기가 발생하였을 때 자금지원 규모와 조건을 협의하는 것은 IMF가 주도하지만, 지원금액 중 IMF가 실제 염출하는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금액은 IBRD·BIS·ADB 등의 여타 국제기구나 미국·일본 등 주요 선진국 중앙은행들의 협조융자에 의존하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의 IMF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창설될 당시의 모습과 상당히 달라졌지만, 한가지 원칙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③ 외환시장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구조조정 비용은 IMF 구제금융 수혜국, 즉 국제수지 적자국이 국내 긴축정책을 통해 전적으로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원칙에도 예외는 있다. 6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국제수지 적자를 기록하고 있고 그 결과 오늘날에는 세계 최대의 채무국이 된 미국이 바로 유일한 예외인정 국가이다. 미국은 과거에 누렸던 헤게모니적 지위는 상실하였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이다. 미국은 핵심적 국제통화로서 여전히 기능하고 있는 달러화의 발행을 통해 국내 긴축정책 없이 국제수지 적자를 지속할 수 있고, 보다 중요하게는 미·일 구조조정협의와 같은 쌍무협상을 통해 대미 흑자국의 구조조정을 직접적으로 강요하여 왔다.
결론적으로, 점증하는 국제통화금융질서의 붕괴 가능성에 대한 IMF의 대응력은 극히 제한되어 있는 가운데, 국제수지 적자국만이 구조조정 비용을 부담하는 방식으로 국제통화금융질서의 불안한 생명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것이 IMF체제의 본질적 특성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만이 예외로 인정됨으로써, 결국 IMF체제는 창설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미국적 경제질서를 세계경제질서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2) IMF 구제금융의 내용
전술한 바와 같이, IMF는 각국 환율의 안정화와 외환거래의 자유화를 추구하면서, 국제수지의 구조적 불균형으로 인해 외환위기를 겪고 있는 회원국에 대해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주요 기능으로 한다. 여기서는 IMF의 자금지원, 즉 구제금융의 유형 및 이에 부수되는 조건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IMF 회원국은 자신에게 배정된 할당액(Quota)을 출자할 의무가 있는데, 그 중 25%는 IMF가 지정하는 국가의 통화, 즉 달러화로 납입하고, 나머지 75%는 자국 통화로 납입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국제 교환성을 회복하지 못한 나라의 통화는 사실상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므로, IMF의 재원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은 달러화로 납입된 부분 뿐이다.
창설 당시의 협정에 의하면, 외환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가 IMF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는 자금규모도 각 회원국의 할당액에 의해 제한되어 있었다. 그 한도는 할당액의 125%, 즉 달러화로 납입한 부분의 500%이다. 이 중 할당액의 25%, 즉 달러화로 납입한 부분만큼은 회원국이 원할 때 언제든지 자유롭게 인출할 수 있는 반면, 할당액의 100%에 해당하는 나머지 한도는 IMF와의 협의를 거쳐 일정한 조건(IMF Conditionality)의 이행을 약속해야만 인출할 수 있다.
한편, 1952년 IMF는 대기성 차관 협정(Stand-By Credit Arrangements) 방식을 도입하였는데, 이후 IMF의 주된 자금지원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것은 회원국이 일정한 내용의 경제안정화 프로그램과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이행할 것을 명기한 비공개 협정을 IMF와 체결하는 방식인데, 이에 의거하여 자금지원을 받는 경우에도 자금전액을 일시에 인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대개 12개월 내지 18개월) 동안 분기별로 협정상의 조건 이행여부를 평가받고 그 결과에 따라 자금을 부분적으로 인출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결과 대기성 차관 협정 방식으로 자금지원을 받는 나라는 사실상 조건의 이행을 회피 내지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IMF의 재원은 한정되어 있는 반면 국제통화금융질서의 불안정성은 날로 증가함에 따라, 60년대 중반 이후 다양한 종류의 자금지원제도가 만들어졌다. IMF의 자금지원제도는 크게 일반지원 제도, 특별지원 제도, 양허성지원 제도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표 1>에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IMF의 주된 자금지원 방식인 대기성 차관 협정은 실제 자금지원이 이루어지기까지 약 2개월 정도가 소요되는 문제가 있어, 최근 멕시코 외환위기를 계기로 그 기간을 2∼3주로 단축시킬 수 있는 긴급차입제도(Emergency Financing Mechanism)가 도입되었다. 이 경우에 보통 대기성 차관 협정 방식도 동시에 추진된다.
<표 1> IMF 자금지원제도의 종류
구 분
내 용
조 건
일반 지원
(Regular Facilities)
1. 준비금 부분
(Reserve Tranche)
국제수지조정 필요에 따라 어느 시점에서나 자유롭게 인출할 수 있음.
이 경우는 인출에 따른 조건이 부과되지 않음.
2. 신용 부분
(Credit Tranches)
회원국 할당액의 25%에 해당하는 일차신용 부분과 할당액의 75%에 해당하는 확대신용 부분으로 나뉨.
일차신용 부분은 비교적 조건이 가벼우나, 확대신용 부분은 엄격한 내용의 정책목표가 조건으로 부과됨.
3. 대기성 차관 협정
(Stand-By
Arrangements)
회원국은 정해진 기간내에 IMF의 재원 중 일부를 인출할 권한을 가짐. 인출은 분기별로 이루어짐
경제운영에 대한 주기적인 평가에 의해 지원계속 여부가 결정됨. 운영평가는 신용정책, 정부·해외차입, 무역 정책, 외환보유고 수준 등을 포함
4. 확대 기금 지원
(Extended Fund
Facility: EFF)
대기성 차관 협정의 경우보다 장기, 대규모 자금을 지원. 주로 사회주의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이행 중에 있는 나라들이 대상임.
기간은 3∼4년 정도. 조건은 대기성 차관 협정의 경우와 동일.
특별 지원
(Special Facilities)
1. 수출변동보상 금융
(Compensatory Financing Facility)
수출 대금의 일시적 부족, 수입비용 상승, 국제금리 상승 등 통제불가능한 상황으로 인한 국제수지조정 필요시 지원.
수출 급감에 따른 국제수지 적자를 당사국이 제어할 수 없는 경우, 그 대책 수립을 IMF와 협의
2. 완충재고 금융
(Buffer Stock Facility)
회원국의 완충재고에 대한 지원. 84년 이후 중단.
국제수지 방어가 곤란한 경우로 한정
3. 체제전환 지원 금융 (Systematic Transformation Facility)
1995년 12월 폐지
-
양허성 지원
(Concessional Facilities)
1. 구조조정 지원
(Structural Adjustment Facility)
저소득 국가들에 중기 거시경제정책이나 구조개혁을 지원하기 위한 원조성 조건의 차관.
-
2. 확대 구조조정 지원
(Enhanced Structural Adjustment Facility)
87년에 생긴 제도로서 저소득 국가의 경상수지 개선을 위한 주요 금융 지원 형태.
중장기적 구조조정을 위한 지원으로서 IMF 및 IBRD 자문관의 지원하에 3년간의 이행 보고서를 제출해야 함.
출처 : 현대경제사회연구원 보고서
3. IMF 구제금융의 조건과 한국 경제
(1) IMF 구제금융에 따른 조건의 일반적 내용 : 긴축정책 및 자유화정책
자금지원제도의 종류에 따라 구제금융 대상국에 부과되는 조건의 내용이 조금씩 다를 뿐만 아니라도, 가장 많이 활동되는 대기성 차관 협정 방식의 경우에도 조건의 내용에 관한 교과서적인 모델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술한 IMF의 기본적인 성격, 그리고 최근의 멕시코·태국·인도네시아 등의 사례(<표 2> 참조)를 통해 그 조건의 내용 및 파급효과를 일반화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리고 12월 4일 IMF 이사회에 제출되었던 보고서가 최근 공개되었는데, 이하에서 논의되는 대부분의 정책 내용이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표 2> IMF 구제금융 양허안사례
멕시코
태국
인도네시아
지원규모
178억 달러
(총 528억 달러)
40억 달러
(총 179억 달러)
100억 달러
(총 330억 달러)
거시경제정책
◆성장률 목표 : -2.0%
◆재정 :
- GDP대비 4.4% 흑자
- 부가가치세율인상
: 10% -> 15%
- 공공투자 삭감
◆임금인상
: 10%이내로 억제
◆공공요금 인상
: 전기 20%,
휘발유 35%
◆성장률 목표 : 3.5%
◆재정 :
- 예산 11.8% 삭감
- 부가가치세율 인상
: 7% -> 10%
- 일부 관세율 인상
- 공공투자 삭감
◆물가 : 5.0%이내
◆경상수지 적자
: GDP대비 3%이내
◆외환보유고 250억달러
◆성장률 목표 : 하향
◆재정
: GDP 1% 이상 흑자
◆물가 : 한자리수
◆경상수지 적자
: 2년내에 GDP대비 2.2%로 축소
금융정책
◆환율 :
- 변동환율제로 이행
- 선물시장 설립
◆금융기관 자기자본비율 달성 강제
◆국내신용 한도 설정
◆중소기업의 은행차입 상환기한 연장
◆부실금융기관 정리
: 58개 시중 금융기관 업무정지, 이중 30개기관 폐쇄
◆부실금융기관 정리
: 16개 시중은행 정리
산업정책
◆정부예산 집행의 최우선순위를 금융산업 복구와 민간투자활성에 둠
◆공기업 민영화 : 발전소, 공항, 항만, 통신 등
-
◆공기업의 농산물 수입 독점 폐지
◆시멘트가격 상한철폐
◆국민차사업 조정 : 2000년까지 국산부품 사용 규정 폐지
출처 : 현대경제사회연구원 보고서
IMF의 구제금융에 따른 조건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당면 외환위기를 초래한 직접적이고 단기적인 요인에 대한 대책이고, 두번째는 보다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요인에 대한 대책으로 IMF 또는 미국의 관점에서 본 해당국 경제질서의 취약점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에서 이 두 부분은 혼재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겠지만, 단순화시켜 본다면 첫째 부분은 안정화 프로그램으로, 두번째 부분은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요약할 수 있다. 차례대로 살펴 보자.
가) 안정화 프로그램 : 긴축정책
IMF 구제금융 신청의 배경인 된 외환위기는 항상 해당국의 경상수지가 구조적인 적자 상태를 기록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경상수지가 흑자를 기록하고 따라서 외환보유고에 여유가 있는 나라가 IMF의 구제금융을 신청하여 경제주권의 상실을 자초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상수지 적자는, 케인즈적 거시경제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해당국의 생산능력 이상으로 지출(그것이 민간의 소비이든 기업·정부의 투자이든 간에)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자국의 생산능력 이상으로 지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외국으로부터 수입을 많이 하는 것 뿐이며, 그 결과는 당연히 경상수지 적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환시장의 위기를 진정시키고 경상수지를 개선하기 위한 안정화 프로그램의 기본적인 내용은 지출의 축소, 즉 긴축정책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안정화 프로그램은 긴축정책의 또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긴축정책의 수단은 매우 다양하다.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정부지출을 감축하는 대신 세율은 인상함으로써 재정적자를 축소(또는 재정흑자를 확대)하는 재정긴축이다. 공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나라의 경우 공기업을 (특히 외국인에) 매각하는 공기업 민영화도 재정을 긴축하는 유력한 방안으로 활용된다. 금융기관의 신용공급 규모를 대폭 감축하는 긴축금융도 빠질 수 없는 안정화 프로그램의 한 요소이다. 긴축금융의 결과 금리는 폭등하게 된다. 한편, IMF가 명시적인 조건으로 제시하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해당국 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실질)임금의 인하도 안정화 프로그램의 핵심적 요소이다.
결국, 어떤 수단을 통하든간에 IMF는 해당국의 경상수지가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을 정도로 강도 높은 긴축정책을 요구하게 된다. 긴축정책의 결과 해당국은 저성장, 심지어는 마이너스 성장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성장률 둔화에 따라 기업과 금융기관도 고통을 받겠지만,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저성장의 고통은 대부분 실업률 상승과 실질임금 인하를 통해 노동자에게 전가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화이트안에 따라) 국제수지 불균형의 조정책임을 전적으로 적자국이 지도록 만든 IMF체제의 궁극적 효과이다. 선진국 자본, 특히 미국 자본의 이익을 위해 후진국, 그 중에서도 후진국 노동자들의 희생이 강요되고 있고, IMF는 그 선봉에 서 있는 것이다.
나) 구조조정 프로그램 : 자유화정책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성격은, 구제금융 대상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후진국의 경제질서와 IMF가 대변하는 미국의 경제질서 사이의 차이를 확인함으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다.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이란 미국의 경제질서를 세계경제질서로 확산시키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후진국들은, 정부가 의욕적인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거나 또는 여타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이유에 의해, 대부분 시장기능이 매우 취약하며 정부가 시장기능의 상당부분을 대신하고 있다. 한걸음 더나아가 선진국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후진국이란 개념은 애초부터 시장이 불완전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지칭하는 것이다. 반면, 미국은 어쨌든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시장경제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미국의 관점에서 후진국 경제질서의 취약점을 파악하고 그 해결책을 강요하는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당연히 자유화정책을 기본적인 내용으로 할 수밖에 없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자유화정책의 또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구제금융을 받는 후진국 경제질서의 특징에 따라 부과되는 자유화정책의 유형도 매우 다양하다. 우선, 외환위기를 겪은 나라의 많은 경우에서 자국의 통화가치를 과대평가하는 방향으로 환율제도를 경직적으로 운영하였는데, 이것이 경상수지의 적자를 누적시키는 중요한 한 요인이 되었다. 이 경우 IMF는 예외없이 환율자유화의 명목하에 변동환율제도로의 이행을 강제하는데, 그 결과 해당국 통화의 환율은 대폭 상승하게 된다(통화가치 하락). 환율상승은 수출기업의 가격경쟁력을 회복시킴으로써 경상수지 적자를 개선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다른 한편 원자재·자본재의 수입가격을 상승시킴으로써 단기적으로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촉발한다. 명목임금의 상승은 억제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면 결국 노동자의 삶의 조건은 크게 악화될 수밖에 없다.
금융시장은 통상 후진국의 시장 중에서도 그 불완전성이 가장 심각한 부분인 것으로 지적된다. 균형금리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서 규제되는 공금리, 제도금융시장과 사금융시장으로 이원화된 금융시장, 자금에 대한 항상적 초과수요에 따른 (특히 공기업과 일부 대기업에 편중되는) 선별적 정책금융체계, 금융기관에 누적된 천문학적 액수의 부실채권 등등의 현상은 IMF의 관점에서는 비효율과 불합리의 전형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금융산업에 대한 IMF의 구조조정은 한결같이 상당수의 금융기관을 파산처리함으로써 부실채권을 강제정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금융산업에 대한 대대적인 규제완화, 즉 금융자유화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은, 금융긴축 효과 및 급속한 인플레이션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단기적으로 금리를 치솟게 할 것이다. 그 결과 차입의존도가 높은 기업, 그리고 금융기관에의 접근 가능성이 낮은 중소기업의 파산을 부채질하고, 실업률을 높이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이상에서 언급한 외환시장·금융시장의 왜곡상은 (경제개발 목적에 의한 것이든 또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목적에 의한 것이든 간에) 정부가 경제활동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것에 따른 결과이다. 특히 대부분의 후진국에서 정부의 경제개입은 공기업의 형태로 나타난다. 따라서 IMF의 자유화정책은 정부의 경제활동을 축소하고 또 관료제적 비효율성을 제거한다는 명목하에 공기업 민영화를 필수적으로 포함하게 된다. 그런데, 공기업 민영화는 또다른 목적(사실은 보다 중요한 목적)을 추구하는 수단으로도 이용된다. 즉 공기업 민영화는 안정화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재정긴축의 수단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노동운동의 중요한 동력 역할을 하는 공기업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는 결정적 수단이 되기도 한다.
같은 후진국이라고 하더라도 각국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노사관계의 특성은 크게 다르다. 따라서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서 노사관계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나라마다 차별적이다. 그러나 노사관계 부분이 크게 취급되지 않는 경우는 그것이 취급되지 않아도 될만큼 노동운동 세력이 미약하다는 것을 반영한 뿐이다. 필요한 경우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임금수준의 차원을 넘어,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명목하에 노사관계 전반에 걸쳐 기업의 자유를 확대하는 내용을 담게 되며, 그 결과는 고용불안 심화와 근로조건의 악화이다.
한편, 선진국 자본의 활동영역이 국경을 넘어 확대됨에 따라, 특히 80년대 이후 국제화·세계화 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단순히 후진국 내부의 자유화 차원에 머물지 않게 되었다. 자유화정책은 대외적 자유화, 즉 개방화를 필수적으로 포함하게 되었으며, 최근에 올수록 대외개방 측면에 보다 강조점을 두게 되었다. 예를 들어, 외환자유화는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인하는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었고, 금융자유화의 경우 그 초점이 금융시장·자본시장 개방으로 이동하였으며, 금융기관 M&A나 공기업 민영화에서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외국인의 참여를 적극 권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처럼 개방화를 핵심요소로 하는 자유화정책을 후진국에 강제함으로써 결국 IMF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선진국 자본의 축적영역을 더욱 확대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후진국 경제질서의 특징, 즉 사용자-노동자간·대-중소기업간·중화학-경공업간·도-농간에 2중구조가 항존하는 상태에서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의한 자유화의 충격이 주어진다면, 그 결과 역시 2중적일 수밖에 없다. 기득권을 가진 쪽은 확대된 자유를 새로운 기회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지배를 받아 온 쪽에는 파탄과 몰락의 자유만이 주어질 것이다.
(2) 한국에 부과된 IMF 구제금융의 조건 및 그 파급효과
가) 긴축정책과 부실 금융기관 정리대책
앞에서 살펴본 IMF 구제금융에 따른 조건의 일반적 내용은 대부분 우리나라에도 적용되었다(<표 3> 참조). 특히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 정부와 기업, 그리고 국민들을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외환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한 단기대책이 (가혹할 정도로) 강도 높게 요구되었다는 사실이다.
최근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겪게 된 표면적인 원인은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와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누적에 있다.
우리나라는 1996년에 237억 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였는데(GNP대비 4.9%), 이것은 GNP대비 비율로만 본다면 약 7%의 기록한 태국에 이어 세계 2위에 해당된다.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경상수지 적자는 외채를 누적시켰고, 특히 1년이내에 상환하여야 할 단기외채가 총외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함으로써 외환시장은 조그만한 충격에도 금방 혼란에 빠질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표 3> IMF 구제금융에 따른 한국의 양허안내용
구 분
내 용
거시
경제적
목표
◆GDP 성장률 : 98년 3%, 99년 잠재성장률 수준(약 5%)
◆물가상승률 : 5% 이하
◆경상수지 적자 : 98년 GDP대비 0.5% 이내(97년은 3%)
◆외환보유고 : 98년말까지 2개월분의 외환보유고 적립
구 분
내 용
정부
정책의
기본방향
◆재정·금융긴축을 통한 외환보유고 제고, 경상수지 적자 축소
◆투명·건전·시장중심적 금융질서 확립을 위한 금융산업 구조조정
◆경제의 위험 분산을 위한 기업의 차입의존도 축소
통화 및
환율정책
◆목표 : 물가상승을 억제하기 위한 긴축기조 유지
◆절차 : IMF스탭과 협의하여 집행
◆내용 : 물가목표에 맞추어 총유동성(M3) 증가율 인하, 단기적으로 고금리 허용, 변동환율제 유지
재정정책
◆목표 : 재정적자 축소와 (부실채권정리에 따른) 금융부문 부담 완화를 위해 GDP의 1.5%에 해당하는 (조세와 지출 양 측면의) 재정조정 실시
◆세수 확대 : 원유세와 특별소비세 인상, 기타 간접세의 과세기준 확대
◆지출 축소 : 경상경비 축소 및 SOC투자 등의 자본지출 축소
금융산업
구조조정
◆기본방향 : 명확하고 엄격한 퇴출정책, 강력한 시장과 감독정책, 경쟁촉진
◆퇴출정책 : 9개 부실 종금사 정리, BIS기준(위험가중 자기자본비율 8%)에 미달하는 은행은 증자나 M&A를 통해 구조조정
◆예금보장 : 2000년말까지만 전액 보장, 이후부터는 소액예금자만 보호
◆회계의 투명성 제고 : 외국 회계법인이 대형금융기관의 회계장부 감사
◆통합금융감독기구 설립 : 독립성 확보 -+- (*두 법안의 입법과정에서 IMF가
◆한국은행 독립 : 물가안정을 주임무 -+ 자신의 의견을 강력 반영할 계획*)
◆개방 : 98년 중반까지 외국은행 자회사 및 외국증권사 현지법인 설립 허용
무역 및
자본
자유화
◆무역자유화 : 무역관련 보조금, 수입선 다변화제도, 규제적인 수입허가제 폐지에 관한 일정표 제시
◆자본자유화
- 외국인 주식매입한도 : 종목당 한도(현 26%)를 97년말 50%, 98년말 55%로 확대, 1인당 한도(현 7%)를 97년말 50%로 확대
- 채권시장 : 98년 2월까지 단기자금시장 및 회사채 시장 개방 확대
- 기업의 해외차입 : 98년 2월말까지 제한 폐지
기업지배
구조 및
기업구조
◆ 기본방향 :
- 금융개혁을 통해 재벌의 은행 차입의존 경영행태 쇄신
- 기업경영 투명성 제고 : 기업의 위험도에 대한 평가를 향상
◆기업경영 투명성 제고 조치
- M&A에 대한 규제 대폭 완화
- 기업공시 철저 : 상장기업에 대한 국제적인 회계기준 도입 및 외부감사인에 의한 감사 의무화, 결합재무제표 도입, 계열사간 상호지급보증 폐지
- 파산관련제도 : 부실기업에 대한 정부보조나 건전기업과의 강제합병 금지
노동시장
◆노동시장 유연화 : 정리해고 제한 완화, 파견근로제 도입
◆고용보험제도 강화
기타
◆금융실명제 : 현행 골격 유지
◆통계자료의 투명성 제고 : 외환보유고, 금융기관의 경영상황, 통합재정수지 등에 대한 자료를 IMF기준에 맞추어 98년 3월말까지 공표
실행기준에 대한 평가
◆98년 1월에 추가적인 양적 실행기준 마련
◆98년에는 3월말, 6월말, 9월말로 맞춰진 실행기준을 3번에 걸쳐 분기별로 검토
출처 : "IMF [한국경제 극비 보고서](전문)", 조선일보 1997.12.8일자 12면에서 정리
그 충격, 그것도 엄청난 규모의 충격이 바로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문제로부터 터져나왔다. 우리나라 금융산업의 부실화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고, 사실 우리나라 사람보다도 외국인이 더 잘 알고 있는 문제이다. 이런 와중에 올해 들어서만 한보,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 뉴코아, 쌍방울, 해태, 한라 등의 재벌기업들이 부도가 나거나 사실상 부도상태에 직면함으로써 금융기관들은 회생불가능할 정도의 부실채권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이에 따른 대외신인도 하락으로 차입외화의 기한갱신이 어려워지면서, 특히 대부분의 종금사들은 사실상 외화부도상태에 직면하였다. 그 중 9개 종금사에 대해서는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졌으며, 12월말까지 충분한 수준의 구조개선 계획을 제출하지 못하는 종금사는 영업취소될 예정이다.
은행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다. 은행감독원의 규정에 의하면 은행의 여신은 건전성 상태에 따라 정상·요주의·고정·회수의문·추정손실 등의 5단계로 분류된다. 이 중에서 최근까지도 '회수의문'과 '추정손실' 부분에 대해서만 공식통계가 발표될 정도로 은행의 부실채권 문제가 은폐되다가, IMF 구제금융 신청을 계기로 '고정' 부분까지의 자료가 공개되었다. 이에 따르면 1997년 9월말 현재 국내은행 전체의 부실채권 규모는 28.2조원으로 총여신의 6.2%에 달한다. '요주의' 부분까지 포함하면 총여신의 15% 정도가 부실채권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국은 '요주의'까지를 포함한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미국 은행들의 평균 부실율이 2∼3%인 것과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 은행의 부실화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 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IMF가 부과한 단기대책의 내용은 단호한 것이었다. 우선, 경상수지 적자를 감축하고 외환보유고를 확대하기 위한 대대적인 안정화 프로그램, 즉 재정·금융상의 긴축정책이 강제되었다. 이에 따라 3% 이하의 GDP 성장률, 5% 이하의 물가상승률이 1998년의 거시경제적 목표수치로 설정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우리나라는 상당기간에 걸쳐 저성장과 고실업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3%의 GDP 성장률 하에서는 실업자 수 110만명에 실업율이 5%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IMF는 부실 금융기관의 정리를 위해 (정부가 금융안정대책으로 내놓았던 부실채권정리기금에 의한 인수, 국내 금융기관간의 M&A 차원을 넘어) 상당수 금융기관의 폐쇄 및 외국인에 의한 적대적 M&A의 허용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부실 금융기관 정리대책은 대외적 외환위기(currency crisis) 사태를 대내적 신용공황(credit crisis) 상황으로 전환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5.16 쿠데타 직후의 증권파동 이후 최초로 증권회사(고려증권)가 파산하였고, 재계 12위 재벌인 한라그룹이 부도가 났으며, M&A 대상으로 소문이 난 몇몇 은행에서는 예금인출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기업과 금융기관의 악순환적 연쇄부도라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이에 대해서는 4절에서 다시 논의할 것임).
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정책
그런데, 긴축정책·부실 금융기관 정리대책의 파급효과에 못지 않게 필자가 우려하는 바는 우리나라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IMF가 제시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가져올 영향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먼저 한국 경제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 IMF가 어떠한 인식을 갖고 있는가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 IMF는 "한국의 금융위기는 (정부의) 신용할당, 기업과 은행간의 유착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기업과 은행간의 유착은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를 너무 쉽게 결정하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라고 함으로써 관치금융과 재벌의 금융독점을 금융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지적하였다.
(필자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는) IMF의 이러한 인식은 그 당사자인 우리나라 정부와 재벌의 인식과는 극단적인 대조를 보이는 것이다. 정부는 IMF 실사단과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사실은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의 실물경제적 기초(Fundamentals)는 건전하다고 강변하면서, 현재의 위기는 단기적인 외환수급 불균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IMF의 자금지원이 시작되면 조만간 진정될 것이라는 인식을 버리지 않았다. 재벌 역시 "깡드쉬 IMF 총재가 한국의 재벌을 경제파탄의 주범으로 꼽고 포기해야 할 낡은 경제시스템으로 규정한 것은 한국 실정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오만하고 위험한 발상이다"(공병호 전경련 부설 자유기업센터 소장)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면서, 민족주의적 감정에 불을 지르고 있다.
따라서 필자가 우려하는 바는, 한국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IMF의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정책의 방향에 있다. 즉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시장의 자유, 따라서 소수 기득권층의 자유(그것이 미국·일본의 초국적 자본이든 또는 국내의 재벌이든 간에)만을 확대하는 정책이다. 우리가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책을 강구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외세에 의한 것이라는 감상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이기 때문이다.
IMF가 우리나라에 부과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크게 금융산업, 재벌체제, 그리고 노동시장에 대한 대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금융산업에 대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전술한 부실 금융기관 정리대책과 관련된 것으로, 금융기관 회계의 투명성 제고를 통한 퇴출정책 강화 이외에도) ① 주식·채권시장 개방 확대 및 외국금융기관의 국내진입 조기 허용 등의 대외적 자유화정책(개방정책)과 ② 행정부로부터 독립된 중앙은행 및 통합금융감독기구의 설립으로 요약되는 대내적 자유화정책(관치금융의 해소)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금융산업 구조조정 방향은 IMF의 신자유주의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금융시장과 금융산업 전반에 걸친 개방 문제는 한·미간의 쌍무협상에서나 우리나라의 OECD 가입협상에서 최대의 쟁점이 된 사항들이다. 대부분의 사항에 대해 이미 개방일정이 잡혀 있었지만, 이번의 IMF 구제금융을 계기로 그 개방시점이 크게 앞당겨지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금융부문의 낙후성을 감안할 때 급격한 개방정책은 초국적 금융자본에 의한 시장잠식을 야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상당기간동안 긴축금융이 불가피한 현 상황에서 국내외 금리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기 때문에 단기자금시장으로의 투기적 핫머니 유입에 따른 혼란이 우려되고 있다. 또한 1997년말까지 외국인 주식투자의 종목당·1인당 한도(현재는 각각 26%, 7%)를 50%로 급격히 확대하도록 강제되어, 외국인의 국내 금융기관·기업에 대한 적대적 M&A 위협이 현실화되었다.
한편, 1997년초 김영삼 대통령의 금융개혁선언 이래 진행되어 온 금융개혁위원회의 작업 중에서 최대 논란거리였던 중앙은행제도 및 금융감독체계 개편 문제도 IMF의 손을 거쳐 일단락될 전망이다. 즉 IMF는 이 두개의 법안 내용에 자신들의 입장을 반영시키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IMF의 입장은 '물가안정을 주임무로 하는 한국은행의 독립성 확립,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된 통합금융감독기구의 설립'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최종적으로 어떻게 결말을 맺게 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IMF 구제금융을 요청하기 직전까지도 금융감독체계의 개편 방향과 관련하여 한국은행과 재경원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빚어졌었던 상황이고, 또한 통합금융감독기구를 어디에다 설치할 것인가는 정부조직 특히 재경원의 조직개편과 관련된 문제인만큼 IMF와 우리나라 정부 사이의 추후협상 결과(또는 이미 체결된 협상의 비공개 부속서에 포함되었지도 모르는)에 크게 의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MF가 통합금융감독기구의 독립성·자율성을 상당한 정도로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통합금융감독기구를 재경원 산하에 두려는 재경원의 의도에 대해 제동을 거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다만, 결국 IMF의 개입에 의해 이 문제가 처리되게 됨으로써 한국은행과 3개 감독원이 그동안 주장해왔던 금융감독기구 통합 반대 입장 역시 묻혀버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특히 금융기관간 M&A에 따라 겸업화 현상이 가속화될 것으로 예측되는데, 이것은 금융감독기구의 분리논리보다는 통합논리의 설득력을 높이는 요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금융감독기구의 통합을 어쩔 수 없는 제약조건으로 전제한다면, (그 통합금융감독기구를 재경원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핵심요소로 하는) 통합금융감독기구의 독립성 확보 문제가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 문제는 한국은행의 독립성 확립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한국은행과 통합금융감독기구 사이의 연결통로를 개설하는 것은 물론, 한국은행이 통화정책을 수행함에 있어 협의의 은행기관 뿐만 아니라 제2금융권과 외환업무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법 개정이 이루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 IMF가 한국의 재벌체제를 낡은 시스템으로 규정함으로써 재벌해체가 우리 사회의 새로운 화두로 던져졌다. 물론 재벌은 이에 대해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강력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IMF의 요구사항이 완벽하게 집행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결코 재벌을 해체하는 데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IMF가 요구한 것은 ① 금융산업 개편을 통한 재벌기업의 차입의존적 경영행태 쇄신과 ② 상호지급보증 폐지, 결합재무제표 공표 등을 통한 기업경영 투명성의 제고일 뿐이다. 이러한 조치만으로 해체될 재벌이라면 이미 오래전에 해체되었을 것이다.
사실 차입의존적 경영행태 쇄신과 기업경영 투명성 제고는 IMF가 최초로 제시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은 지난 80년대 후반이래 정부가 끊임없이 만들어냈던 재벌정책들 속에 항상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현 김영삼 정권이 1996년 4.11 총선 직전에 제기하였던 신재벌정책, 그리고 최근에 발표되었던 [21세기 국가과제] 속의 '기업경영 투명성 제고 및 기업지배구조의 선진화'의 핵심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90년대 들어 재벌의 힘이 정부의 힘을 능가해버린 상황 속에서 김영삼 정권이 제기하고도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던 과제를 IMF가 다시 한번 제시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과거에 김영삼 정권이 제기하였던 재벌정책이나 현재 IMF가 요구하는 있는 구조조정 정책이나 모두 진정한 의미의 재벌해체를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선진국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너무나 후진적인 재벌들의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번 IMF의 요구는 재벌들의 힘에 억눌려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던 시장기능을 활성화하는, 즉 시장에 보다 많은 자유를 부여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적 자유화정책의 산물이다.
IMF는 김영삼 정권보다 훨씬 큰 강제력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에, IMF의 요구는 재벌체제의 후진성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며, 이를 현실화하는 것은 진보진영의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자유는 소수 기득권층의 자유에 불과하고, 재벌이 우리 사회의 핵심 기득권층에서 탈락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신자유주의의 속성상 재벌총수의 소유권 및 이에 기초한 경영권을 직접 제약하는 정책을 IMF가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IMF의 구조조정 정책에 의해 시장의 자유가 확대됨으로써 그동안 재벌총수의 경영권 행사를 제약하였던 정치·사회적 요인(특히 재벌의 경제력 집중에 대한 비판)이 급격하게 힘을 잃게 되는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최근 계속된 경제위기와 IMF의 구조조정 요구로 인해 부실 재벌들은 도산할 수밖에 없겠지만, 여기서 살아남는 재벌들, 특히 상위 거대재벌들은 부실기업 인수과정을 거쳐 그 힘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대우그룹의 쌍용자동차의 인수를 계기로 가속화될 자동차산업 구조개편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결론적으로, IMF의 요구로 인해 재벌의 후진성은 크게 개선될 것이다. 그러나 구조조정 과정이 신자유주의적인 IMF에 의해 주도되거나 또는 심지어 수구적인 재벌·차기정권에 의해 왜곡된다면, 그 결과는 재벌해체가 아니라 보다 세련화된 거대독점자본의 탄생일 뿐이다. 구조조정 과정에 대한 노동·진보진영의 적극적인 대응이 요구되는 근본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이에 대해서는 4절에서 다시 논의할 것임).
셋째, 금융산업 구조조정과 재벌문제에 대해 IMF가 견지하였던 신자유주의적 원칙은 노동시장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즉 IMF는 대법원 판례에 의해 현재 시행 중인 정리해고제의 요건을 완화하고 파견근로제를 새로 도입함으로써 노동시장을 유연화할 것을 명시적으로 요구하였다. 이것은, 긴축정책 및 부실 금융기관 정리대책의 효과에 더하여, 고용불안을 더욱 심화시키고 결국 노동대중의 삶을 파괴할 것이다. 현 경제위기의 근본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IMF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통해 시장의 자유, 특히 기업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4. IMF 정책처방의 문제점 및 대안
IMF와의 협상이 타결되고 실제 자금지원이 시작된 현 시점에서도 한국 경제의 위기상황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최근의 경제상황은 전형적인 신용공황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이에 편승하여 재벌들은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적 감정을 선도함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를 호도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량해고와 임금삭감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전가하려는 구조조정 전략을 획책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과 관련하여 이하에서는 IMF의 정책처방이 초래한 현실적 문제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이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보기로 한다.
(1) 과도한 긴축과 신용공황
외환보유고를 확충하고 경상수지 적자를 개선하기 위한 유일한 대책으로서 긴축을 강요하고 있는 IMF의 정책처방은, 노동대중에 대한 파괴적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고, 구조조정조차 지연시키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실업보험 등의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고, 또한 위기극복을 위한 전략의 수립과정에 대해 노동자들의 실질적 참여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시행되는 과도한 긴축정책은 구조조정에 따른 고통을 대부분 노동자들에게 전가함으로써 정치적·사회적 불안을 야기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기업의 생산성도 향상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의 한국 경제는 긴축정책이 본격화되기도 전에 신용공황 국면으로 급전직하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9개 종금사의 영업정지, 고려증권의 부도, 그리고 IMF가 일부 은행에 대해서까지 구조조정을 요구했다는 유언비어(?) 등으로 인해 자금흐름이 경색단계를 넘어 거래 자체가 중단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기업-금융기관의 악순환적 연쇄부도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한국 경제가 이른바 구조조정을 통해 새로운 도약을 하기는 커녕 그대로 주저앉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사태가 이처럼 악화된 직접적 원인은 물론 현 정부의 정책적 무능에 있다. 기아사태가 발생했을 때 존재하지도 않는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용공황이 눈앞에 보이는 현 순간에도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시장이 존재하지 않거나 불완전할 때 경제활동에 개입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특히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핵심인 금융질서가 붕괴될 위험에 직면하였을 때 이를 지탱하는 것은 정부의 절대적 의무이며, 이것은 IMF를 포함한 신자유주의자들조차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부가 개입하는 경우에도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투명성과 한시성이 그것이다. 즉 정부가 개입하는 방식이 투명해야 하며, 개입 기간은 위기극복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으로 한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은 구제금융을 받고 있는 현 상황에서 IMF를 납득시킬 수 있는 기본 조건이며, 무엇보다 먼저 대국민 신뢰성을 회복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애초에 구조개선 명령을 받았던 종금사 리스트와 IMF와의 협상과정에서 전격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던 종금사 리스트가 일치하지 않는 식의 사태가 계속되는 한 그 어떠한 정부정책도 효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정부가 개입을 통해 보호하고자 하는 대상의 우선순위를 변경하여야 한다. 60년대이래 오늘날까지 정부의 보호대상은 언제나 차입자, 특히 재벌들이었다. 물론 관치금융이 지속되는 상황하에서 금융기관은 절대 도산하지 않는다는 믿음(不倒 신화)이 존재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IMF가 지적하였듯이, 정부에 의해 신용할당이 이루어지고 재벌과 금융기관이 유착된 구조는 외국 금융기관들(해외 저축자)에게 신뢰감을 줄 수 없었고, 결국 투자철수와 투기적 외환공격으로 이어졌다. IMF의 자금지원을 받음으로써 이제 대외적 외환위기(currency crisis) 사태는 수습될 전망이 생겼지만, 대신 금융기관의 不倒 신화가 깨짐으로써 국내 저축자의 신뢰가 붕괴되는 대내적 신용공황(credit crisis) 상황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신용공황 위험에 직면하여 정부가 보호해야 할 첫번째 대상은 국내 저축자(즉 일반 국민)가 되어야 한다. 위기상황에서 차입자, 특히 재벌만을 보호하려는 임기응변식 대책이 어떠한 파국적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이미 생생하게 경험하였다. 부도방지협약이 결국 부도촉진 효과만을 낳았던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험에 비추어볼 때, 최근에 재벌과 차기 대권 후보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였던 금융실명제 유보와 차입금상환 유예 대책은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국내 저축자들의 신뢰를 더욱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언제 예금인출이 정지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금융기관에 돈을 맡길 저축자는 어디에도 없다. 이 때 2000년말까지 모든 예금의 원리금상환을 전액 보장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따라서 신용공황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부실 금융기관 정리대책을 수정하여야만 한다. 성업공사내 부실채권정리기금이 부실채권을 떠안는다는 조건하에, 국제기준에 미달하는 금융기관은 무조건 폐쇄 내지 구조조정을 요구하겠다는 IMF의 원칙이 바로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금융기관들을 위축시키는 원인이다. 물론 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현 상황에서 부실 금융기관을 무작정 살려둘 수만도 없다. 따라서 필자가 생각하는 방식은, 폐쇄가 불가피한 금융기관의 경우 모든 자산·부채를 정부가 설립한 가교은행(bridge bank)에 이관시킴으로써 그 정리절차가 마무리될 때까지 최소한의 영업을 계속하는 것, 특히 일반 국민들의 예금인출이 언제나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근원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한 금융기관의 경우는 제일·서울은행의 예에서와 같이 정부의 출자를 통해 공기업화한 후 (M&A 등을 포함한) 필요한 조치를 마무리하여야 한다. 이 때 IMF가 요구한다면, 민영화 시점을 명확히 약속하는 것도 한 방편이 될 것이다.
이상의 방식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정부가 뒷짐진 채 신용공황을 방치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2) 경영투명성 제고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재벌해체
전술한 바와 같이, 재벌에 대한 IMF의 구조개선 요구사항은 차입의존적 경영행태 쇄신과 기업경영 투명성 제고일 뿐 진정한 의미의 재벌해체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IMF와 그 배후의 미국이 대변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는 소유권(및 이에 따른 경영권)의 신성불가침성을 전제로 하면서, 시장에서의 투명한 경쟁(이른바 시장규율(market discipline))이 소유권의 남용을 막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효율성 증가를 유도한다는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프로그램 내에는 그 속성상 재벌총수의 소유경영권 독점문제를 직접 해결하고자 하는 적극적 대책이 포함될 수 없으며,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것이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나 한국의 재벌체제에서 총수 1인이 소유경영권을 독점하는 문제의 심각성은 경영투명성 제고라는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견제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고 있다. 재벌에 대한 기업지배권 시장(market for corporate governance)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부실 재벌이 아닌 한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 확대에 따른 적대적 M&A 가능성도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못한다.
재벌의 자본구성 현황을 보면 그 천민성은 극에 다다른다. 1996년 4월 현재 30대 재벌의 총자산 340조원 중 자기자본은 70조원에 불과하다(자기자본비율 = 20.5%). 자기자본 중 재벌총수와 그 가족이 직접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약 7조원에 지나지 않지만, 24조원에 이르는 계열사간 상호출자에 의해 재벌총수는 자기자본 70조원의 44.1%인 31조원을 직간접적으로 지배하고 있다(총수 및 특수관계인 지분율 10.3% + 계열사 지분율 33.8% = 내부지분율 44.1%). 결국 재벌총수는 총자산 340조원의 2%인 7조원에 대한 소유권을 기반으로, 39조원의 지분을 소유한 외부주주의 소유권 행사는 말할 것도 없고, 270조원의 부채자금을 제공한 일반 국민들의 소유권 행사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2%만으로 100% 전체에 대한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관철시키는 재벌체제가 유지되는 한 경제위기는 계속될 것이며, 이에 따른 고통은 항상 노동자와 금융기관(결국은 금융기관에 저축한 국민 전체)에게 전가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재벌해체는 기업경영 투명성 제고 차원을 넘어 총수 1인의 소유경영권 독점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는 대책을 포함할 때에만이 실현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총수 1인의 소유경영권 독점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은, 2차 세계대전 직후 맥아더 사령부가 일본 재벌을 해체한 것과 같이, 재벌총수가 소유한 지분을 몰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아무리 IMF신탁통치가 시행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시대적 상황하에서는 실현가능성이 크지 않다.
따라서 필자가 생각하는 방식은, (종업원 지주제를 포함한) 강력한 소유분산 정책에 의해 전문경영인 체제를 확립하는 동시에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기업경영의 전략적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는 것이다. 이해관계자 중에서도 특히 기업내부자로서는 노동자대표(또는 노조), 기업외부자로서는 채권자이자 대주주인 금융기관(기관투자가)의 경영 참여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으로써 총수 1인을 위한 재벌기업이 다수의 이해관계자에게 봉사하는 국민기업으로 전환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사항이 있다. '재벌이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른바 국경없는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재벌체제는 어쩔 수 없는 필요악 아닌가?'라는 재벌 자신과 정부의 변명이 그것이다. 이 변명에 다수의 노동자들이 체념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재벌해체라는 진보진영의 대안이 기업해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모든 대기업을 중소기업으로 만들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거대한 규모의 대기업도 필요하고 중소기업도 필요하다. 자동차산업의 경우, 최종조립기업은 수십만평의 공장에 수만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거대기업일 수밖에 없지만,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수천, 수만개의 부품은 작은 규모의 중소기업이 공급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효율적이면서 공평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가이다.
다른 한편,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재벌이 필요악이라고 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쟁력 있는 개별기업으로서의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이지, 삼성그룹 전체나 현대그룹 전체가 아니다. 삼성전자가 1994년과 1995년에 얻은 수조원의 순이익은 삼성전자의 반도체 투자를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 삼성전자의 자금력과 대외신용도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삼성자동차 투자에 전용되는 것은 국제경쟁력 향상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건희 회장을 제외하고 삼성전자의 주주 중 그 누구도 이에 동의한 바 없다. 그 결과는 삼성전자 자체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기아자동차의 몰락에 따른 혼란에서 보듯이, 국민경제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룹내부 경영의 측면에서나 국민경제 전체에 대해서나 독재를 자행하고 있는 재벌을 근원적으로 혁신하지 않고서는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자유를 박탈당한 노예의 상태로 전락할 것이며, 치열한 국제경쟁에서도 패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재벌체제의 근원적 혁신은 형평성의 측면에서나 효율성의 측면에서나 절박한 과제이다.
5. 결론
긴축정책과 자유화정책을 핵심으로 하는 IMF의 정책처방은 특히 노동자계층에 대해 파괴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또한 IMF의 정책처방이 실제 집행되는 과정에서 재벌과 차기 정권에 의해 수구적 방향으로 왜곡될 위험성도 매우 농후하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인 IMF로부터도, 수구적인 재벌과 차기 정권으로부터도 노동자와 진보진영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수구적인 재벌과 정치권을 근원적으로 혁신함으로써 진보적 경제사회질서를 창출하는 과제는 노동자와 진보진영의 것일 수밖에 없다.
현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도 고통을 부담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경제적·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노동자들 자신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근원적 혁신을 통해 재벌과 정치권도 뼈를 깎는 고통을 부담할 것을 요구하는 노동자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 '참여의 권리, 그리고 이에 따른 책임의 분담.' 이 양자가 병존할 때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질 것이며, 우리는 희망의 미래사회로 나아가는 실천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권리와 책임이 병존하는 미래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노동자·민중의 경제적·정치적 주장이 반영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즉 민주·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진보에 의해 견제되지 않는 보수는 수구에 불과하며, 올해 분명히 확인했듯이 수구권력은 위기극복을 위한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고 오히려 위기를 심화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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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한국 경제는 지금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고 있다. 지난 11월 21일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이후 10여일간의 숨막히는 협상과정 끝에 12월 3일 550억 달러의 자금지원 및 이에 따른 가혹한 내용의 구조조정 조건을 담은 양해각서가 체결되었다. 올해 들어서 재벌기업들이 줄줄이 부도가 나고 하루에 40개가 넘는 중소기업들이 도산하더니, 결국 국가경제 전체가 파산하였음을 공식 선언하게 된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IMF는 GATT(현 WTO)와 함께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경제질서를 주도하여 온 국제기구이다. IMF는 구조적인 국제수지 적자로 인해 외환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에게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단 IMF의 구제금융은 그 수혜국의 경제정책과 경제구조에 대한 조정을 강제적인 조건으로 부과하게 되는데(IMF Conditionality), 이것은 구제금융 수혜국의 경제주권이 크게 제약됨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나라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는 나라로서 경제주권을 IMF에 이양하게 되었고, '제2의 국치일'을 맞게 된 셈이다.
한국 경제가 공황(panic) 상황을 맞고 있는 것만큼, 한국의 경제학도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 '조화로운 시장경제질서 하에서는 공황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주류경제학(특히 자유주의 경제학)은 눈 앞의 현실에 침묵할 수밖에 없다. 반면, 시장경제질서의 불안정성 또는 그 모순을 주장하던 비주류경제학(포스트 케인즈학파 또는 맑스경제학)은 구체적 대안의 제시라는 현실의 요구 앞에서는 무력감을 토로할 수밖에 없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현실의 역동성을 파악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기에는 그 틀이 너무나 좁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 특히 이번 위기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분명히 알고 있다.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파동, 한보부도사태 및 김현철 국정개입 의혹, 기아부도사태 및 이를 둘러싼 정계·관계·재계의 음모, 외환·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방치한 정치적 직무유기와 정책적 무능 등 최근 1년동안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 앞에서는 장황한 이론이 필요없다. 즉 금융을 수단으로 하여 정부가 주도하고 재벌이 중심이 되는 경제구조, 이와 연관된 반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정치구조가 바로 위기의 근본 원인이다.
따라서 천민적 재벌경제구조와 부패한 수구정치구조를 근원적으로 혁신하지 않고서는 한국 사회의 미래에는 희망이 있을 수 없다. 더구나 위기의 원인 제공자인 재벌과 정부는 건재한 채 노동자만이 고통을 전담하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이 이루어져서는 새로운 도약은 커녕 작금의 위기로부터 회복될 수도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먼저 IMF의 성격과 그 구제금융의 내용을 살펴보고, 이러한 일반적 논의를 기초로 이번에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된 데 따른 장단기적인 파급효과를 예측해본다. 마지막으로는 최근에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구체적 현실의 문제, 즉 신용공황과 재벌해체의 문제를 노동자·민중의 관점에서 해결하기 위한 대응책을 모색해보기로 한다.
2. IMF와 그 구제금융
(1) IMF의 성격
IMF는 1차 세계대전, 대공황,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사건들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20세기 전반부의 역사적 산물이며,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경제질서를 (GATT(현 WTO)와 함께) 주도하여 온 20세기 후반부의 골격이기도 하다.
국제통화금융질서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2차 세계대전 이전의 20세기 전반부는 세계금본위제도의 붕괴와 각국의 경쟁적 평가절하로 점철된 혼란의 역사이다. 국제통화금융질서의 혼란은 국제무역을 위축시킴으로써 자본축적에 대한 결정적 장애물이 되었다.
이러한 경험에 기초하여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전승국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환율의 안정화, 외환거래의 자유화를 실현하고 그 위에 국제통화금융질서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국제기구를 설립하기로 하였는데, 이것이 1945년 12월 브레튼 우즈 협정에 의해 창설된 IMF(국제통화기금)이다.
IMF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창설 과정에서의 논의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경제질서, 특히 그 중에서도 국제통화금융질서에 대한 구상은 주로 영국과 미국이라는 양 강대국 사이에서 논의되었는데, 그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영국은 전시 중에는 물론 전후의 부흥에도 미국의 대규모 원조를 필요로 하고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 전까지 영국의 파운드화가 누려왔던 전통적 국제통화로서의 기능과 지위만은 최소한 계속 유지하려고 하였다. 반면, 이미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며 생산과 무역의 측면에서도 압도적 우위를 확보하게 된 미국은 스스로 세계경제의 헤게모니적 지위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 미국의 경제력을 감안할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은 오히려 이것이 자기의 책임이라는 자부심까지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이해관계 대립은 IMF의 조직구성에 관한 초안 작성단계에서부터 그대로 표출되어, 1943년 경에는 영국의 케인즈안(Keynes Plan)과 미국의 화이트안(White Plan)이라는 두개의 대조적인 초안이 제출되었다. 이 두 초안은 ① 국제통화의 창출 방식, ② 국제기구의 재원마련 방식, ③ 국제수지 불균형의 조정 책임 소재 등의 쟁점사항에서 극단적인 이견을 보였다.
먼저, 영국의 케인즈안은 ① 금이나 (미국의 달러화로 될 것이 확실시되는) 어떤 한 나라의 화폐가 국제통화의 중심이 되는 체제는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국제통화는 신용화폐 형태로 새롭게 만들어져야 하며, ② 국제기구가 회원국에 금융지원을 하는 데 필요로 하는 재원 역시 회원국의 직접 출자가 아니라 신용창출 형태로 새롭게 공급되어야 하고, ③ 국제수지 불균형을 조정하는 비용은 적자국 뿐만 아니라 흑자국 역시 동등한 비중으로 공동부담하여야 한다는 것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즉 케인즈안은 경제력이 쇠락하고 국제수지 적자가 예상되는 영국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IMF가 케인즈안을 기초로 해서 창설될 가능성은 애초부터 전무하였다. IMF는 이미 압도적인 경제력을 확보한 미국의 입장을 철저하게 반영하는 형태로 창설되었다. 즉 미국의 화이트안이 제시한대로 ① 금 및 (고정된 비율로 금과 교환될 수 있는 유일한 통화인) 미국의 달러화가 국제통화의 중심이 되며, ② 각 회원국의 경제력과 약간의 정치적 요소를 반영하는 비율로 배분된 할당액(Quota)을 회원국이 직접 출자함으로써 재원을 마련하고, ③ 국제수지의 구조적 불균형 및 이에 따른 외환시장 불안정의 조정책임은 국제수지 적자국이 전적으로 국내 긴축정책을 통해 부담하는 형태로 IMF는 조직되었다.
이로써 2차 세계대전 이후 IMF는, 국제무역질서 측면에서의 GATT(현 WTO)와 함께, 국제통화금융질서 측면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확인하고 이를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전후 복구를 통해 서독·프랑스·영국·일본 등 주요 선진국의 경제가 회복되면서 미국의 경제력은 상대적으로 하락하였다. 그 결과 미국의 압도적 경제력을 전제조건으로 하여 출범하였던 브레튼 우즈 체제는 60년대 이후 계속 혼란을 거듭하다가 1971년 8월 미국이 달러화의 금 태환을 정지함으로써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IMF의 구성과 기능에도 적지않은 변화가 야기되었다.
먼저, ① 국제통화로서의 금의 기능을 완전히 정지시키면서 각국의 환율체계는 고정환율제도에 변동환율제도로 이행하였다.
또한 ② 60년대 이후 국제통화금융질서의 불안정성이 점차 확대되는 추세에 대해 회원국들의 출자금으로 마련된 재원만으로는 적절히 대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재원확보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산물이 1969년 IMF협정 개정을 통해 도입된 SDR(Special Drawing Rights; 특별인출권)이다. SDR은 금과의 교환이 인정되지 않고 또 그 창출의 전제조건으로 별도의 준비금(reserve)을 적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국제신용화폐이다.
그러나 SDR을 대량 창출하는 것은 국제유동성을 과잉상태로 만들어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중시킨다는 우려가 제기되었고, 또 창출된 SDR을 회원국간에 어떤 비율로 배분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었기 때문에, SDR은 70년대 몇차례의 증액 이후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SDR은 IMF의 새로운 재원조달 방안으로 크게 기여하지 못하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국제기구의 회계단위로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신 IMF는 여타 국제기구나 각국 중앙은행으로부터의 차관도입에 의해 필요한 재원을 보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IMF의 재원 확대 실적이 지지부진한 데 비해, 외환시장의 혼란을 진정시키는 데 필요한 자금지원 규모는 점점 커져 갔다. 특히 80년대 이후 금융산업의 자유화·국제화 추세에 따라 국제적 투기자금의 규모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그만큼 국제통화금융질서가 붕괴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오늘날에는 국제외환시장의 거래액 중 수출입 등의 경상거래를 결제하기 위한 외환거래 비중은 10%가 채 되지 않으며, 나머지 90% 이상이 모두 단기적 투기거래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회원국의 외환시장에 위기가 발생하였을 때 자금지원 규모와 조건을 협의하는 것은 IMF가 주도하지만, 지원금액 중 IMF가 실제 염출하는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금액은 IBRD·BIS·ADB 등의 여타 국제기구나 미국·일본 등 주요 선진국 중앙은행들의 협조융자에 의존하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의 IMF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창설될 당시의 모습과 상당히 달라졌지만, 한가지 원칙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③ 외환시장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구조조정 비용은 IMF 구제금융 수혜국, 즉 국제수지 적자국이 국내 긴축정책을 통해 전적으로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원칙에도 예외는 있다. 6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국제수지 적자를 기록하고 있고 그 결과 오늘날에는 세계 최대의 채무국이 된 미국이 바로 유일한 예외인정 국가이다. 미국은 과거에 누렸던 헤게모니적 지위는 상실하였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이다. 미국은 핵심적 국제통화로서 여전히 기능하고 있는 달러화의 발행을 통해 국내 긴축정책 없이 국제수지 적자를 지속할 수 있고, 보다 중요하게는 미·일 구조조정협의와 같은 쌍무협상을 통해 대미 흑자국의 구조조정을 직접적으로 강요하여 왔다.
결론적으로, 점증하는 국제통화금융질서의 붕괴 가능성에 대한 IMF의 대응력은 극히 제한되어 있는 가운데, 국제수지 적자국만이 구조조정 비용을 부담하는 방식으로 국제통화금융질서의 불안한 생명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것이 IMF체제의 본질적 특성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만이 예외로 인정됨으로써, 결국 IMF체제는 창설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미국적 경제질서를 세계경제질서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2) IMF 구제금융의 내용
전술한 바와 같이, IMF는 각국 환율의 안정화와 외환거래의 자유화를 추구하면서, 국제수지의 구조적 불균형으로 인해 외환위기를 겪고 있는 회원국에 대해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주요 기능으로 한다. 여기서는 IMF의 자금지원, 즉 구제금융의 유형 및 이에 부수되는 조건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IMF 회원국은 자신에게 배정된 할당액(Quota)을 출자할 의무가 있는데, 그 중 25%는 IMF가 지정하는 국가의 통화, 즉 달러화로 납입하고, 나머지 75%는 자국 통화로 납입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국제 교환성을 회복하지 못한 나라의 통화는 사실상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므로, IMF의 재원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은 달러화로 납입된 부분 뿐이다.
창설 당시의 협정에 의하면, 외환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가 IMF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는 자금규모도 각 회원국의 할당액에 의해 제한되어 있었다. 그 한도는 할당액의 125%, 즉 달러화로 납입한 부분의 500%이다. 이 중 할당액의 25%, 즉 달러화로 납입한 부분만큼은 회원국이 원할 때 언제든지 자유롭게 인출할 수 있는 반면, 할당액의 100%에 해당하는 나머지 한도는 IMF와의 협의를 거쳐 일정한 조건(IMF Conditionality)의 이행을 약속해야만 인출할 수 있다.
한편, 1952년 IMF는 대기성 차관 협정(Stand-By Credit Arrangements) 방식을 도입하였는데, 이후 IMF의 주된 자금지원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것은 회원국이 일정한 내용의 경제안정화 프로그램과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이행할 것을 명기한 비공개 협정을 IMF와 체결하는 방식인데, 이에 의거하여 자금지원을 받는 경우에도 자금전액을 일시에 인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대개 12개월 내지 18개월) 동안 분기별로 협정상의 조건 이행여부를 평가받고 그 결과에 따라 자금을 부분적으로 인출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결과 대기성 차관 협정 방식으로 자금지원을 받는 나라는 사실상 조건의 이행을 회피 내지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IMF의 재원은 한정되어 있는 반면 국제통화금융질서의 불안정성은 날로 증가함에 따라, 60년대 중반 이후 다양한 종류의 자금지원제도가 만들어졌다. IMF의 자금지원제도는 크게 일반지원 제도, 특별지원 제도, 양허성지원 제도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표 1>에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IMF의 주된 자금지원 방식인 대기성 차관 협정은 실제 자금지원이 이루어지기까지 약 2개월 정도가 소요되는 문제가 있어, 최근 멕시코 외환위기를 계기로 그 기간을 2∼3주로 단축시킬 수 있는 긴급차입제도(Emergency Financing Mechanism)가 도입되었다. 이 경우에 보통 대기성 차관 협정 방식도 동시에 추진된다.
<표 1> IMF 자금지원제도의 종류
구 분
내 용
조 건
일반 지원
(Regular Facilities)
1. 준비금 부분
(Reserve Tranche)
국제수지조정 필요에 따라 어느 시점에서나 자유롭게 인출할 수 있음.
이 경우는 인출에 따른 조건이 부과되지 않음.
2. 신용 부분
(Credit Tranches)
회원국 할당액의 25%에 해당하는 일차신용 부분과 할당액의 75%에 해당하는 확대신용 부분으로 나뉨.
일차신용 부분은 비교적 조건이 가벼우나, 확대신용 부분은 엄격한 내용의 정책목표가 조건으로 부과됨.
3. 대기성 차관 협정
(Stand-By
Arrangements)
회원국은 정해진 기간내에 IMF의 재원 중 일부를 인출할 권한을 가짐. 인출은 분기별로 이루어짐
경제운영에 대한 주기적인 평가에 의해 지원계속 여부가 결정됨. 운영평가는 신용정책, 정부·해외차입, 무역 정책, 외환보유고 수준 등을 포함
4. 확대 기금 지원
(Extended Fund
Facility: EFF)
대기성 차관 협정의 경우보다 장기, 대규모 자금을 지원. 주로 사회주의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이행 중에 있는 나라들이 대상임.
기간은 3∼4년 정도. 조건은 대기성 차관 협정의 경우와 동일.
특별 지원
(Special Facilities)
1. 수출변동보상 금융
(Compensatory Financing Facility)
수출 대금의 일시적 부족, 수입비용 상승, 국제금리 상승 등 통제불가능한 상황으로 인한 국제수지조정 필요시 지원.
수출 급감에 따른 국제수지 적자를 당사국이 제어할 수 없는 경우, 그 대책 수립을 IMF와 협의
2. 완충재고 금융
(Buffer Stock Facility)
회원국의 완충재고에 대한 지원. 84년 이후 중단.
국제수지 방어가 곤란한 경우로 한정
3. 체제전환 지원 금융 (Systematic Transformation Facility)
1995년 12월 폐지
-
양허성 지원
(Concessional Facilities)
1. 구조조정 지원
(Structural Adjustment Facility)
저소득 국가들에 중기 거시경제정책이나 구조개혁을 지원하기 위한 원조성 조건의 차관.
-
2. 확대 구조조정 지원
(Enhanced Structural Adjustment Facility)
87년에 생긴 제도로서 저소득 국가의 경상수지 개선을 위한 주요 금융 지원 형태.
중장기적 구조조정을 위한 지원으로서 IMF 및 IBRD 자문관의 지원하에 3년간의 이행 보고서를 제출해야 함.
출처 : 현대경제사회연구원 보고서
3. IMF 구제금융의 조건과 한국 경제
(1) IMF 구제금융에 따른 조건의 일반적 내용 : 긴축정책 및 자유화정책
자금지원제도의 종류에 따라 구제금융 대상국에 부과되는 조건의 내용이 조금씩 다를 뿐만 아니라도, 가장 많이 활동되는 대기성 차관 협정 방식의 경우에도 조건의 내용에 관한 교과서적인 모델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술한 IMF의 기본적인 성격, 그리고 최근의 멕시코·태국·인도네시아 등의 사례(<표 2> 참조)를 통해 그 조건의 내용 및 파급효과를 일반화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리고 12월 4일 IMF 이사회에 제출되었던 보고서가 최근 공개되었는데, 이하에서 논의되는 대부분의 정책 내용이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표 2> IMF 구제금융 양허안사례
멕시코
태국
인도네시아
지원규모
178억 달러
(총 528억 달러)
40억 달러
(총 179억 달러)
100억 달러
(총 330억 달러)
거시경제정책
◆성장률 목표 : -2.0%
◆재정 :
- GDP대비 4.4% 흑자
- 부가가치세율인상
: 10% -> 15%
- 공공투자 삭감
◆임금인상
: 10%이내로 억제
◆공공요금 인상
: 전기 20%,
휘발유 35%
◆성장률 목표 : 3.5%
◆재정 :
- 예산 11.8% 삭감
- 부가가치세율 인상
: 7% -> 10%
- 일부 관세율 인상
- 공공투자 삭감
◆물가 : 5.0%이내
◆경상수지 적자
: GDP대비 3%이내
◆외환보유고 250억달러
◆성장률 목표 : 하향
◆재정
: GDP 1% 이상 흑자
◆물가 : 한자리수
◆경상수지 적자
: 2년내에 GDP대비 2.2%로 축소
금융정책
◆환율 :
- 변동환율제로 이행
- 선물시장 설립
◆금융기관 자기자본비율 달성 강제
◆국내신용 한도 설정
◆중소기업의 은행차입 상환기한 연장
◆부실금융기관 정리
: 58개 시중 금융기관 업무정지, 이중 30개기관 폐쇄
◆부실금융기관 정리
: 16개 시중은행 정리
산업정책
◆정부예산 집행의 최우선순위를 금융산업 복구와 민간투자활성에 둠
◆공기업 민영화 : 발전소, 공항, 항만, 통신 등
-
◆공기업의 농산물 수입 독점 폐지
◆시멘트가격 상한철폐
◆국민차사업 조정 : 2000년까지 국산부품 사용 규정 폐지
출처 : 현대경제사회연구원 보고서
IMF의 구제금융에 따른 조건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당면 외환위기를 초래한 직접적이고 단기적인 요인에 대한 대책이고, 두번째는 보다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요인에 대한 대책으로 IMF 또는 미국의 관점에서 본 해당국 경제질서의 취약점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에서 이 두 부분은 혼재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겠지만, 단순화시켜 본다면 첫째 부분은 안정화 프로그램으로, 두번째 부분은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요약할 수 있다. 차례대로 살펴 보자.
가) 안정화 프로그램 : 긴축정책
IMF 구제금융 신청의 배경인 된 외환위기는 항상 해당국의 경상수지가 구조적인 적자 상태를 기록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경상수지가 흑자를 기록하고 따라서 외환보유고에 여유가 있는 나라가 IMF의 구제금융을 신청하여 경제주권의 상실을 자초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상수지 적자는, 케인즈적 거시경제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해당국의 생산능력 이상으로 지출(그것이 민간의 소비이든 기업·정부의 투자이든 간에)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자국의 생산능력 이상으로 지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외국으로부터 수입을 많이 하는 것 뿐이며, 그 결과는 당연히 경상수지 적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환시장의 위기를 진정시키고 경상수지를 개선하기 위한 안정화 프로그램의 기본적인 내용은 지출의 축소, 즉 긴축정책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안정화 프로그램은 긴축정책의 또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긴축정책의 수단은 매우 다양하다.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정부지출을 감축하는 대신 세율은 인상함으로써 재정적자를 축소(또는 재정흑자를 확대)하는 재정긴축이다. 공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나라의 경우 공기업을 (특히 외국인에) 매각하는 공기업 민영화도 재정을 긴축하는 유력한 방안으로 활용된다. 금융기관의 신용공급 규모를 대폭 감축하는 긴축금융도 빠질 수 없는 안정화 프로그램의 한 요소이다. 긴축금융의 결과 금리는 폭등하게 된다. 한편, IMF가 명시적인 조건으로 제시하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해당국 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실질)임금의 인하도 안정화 프로그램의 핵심적 요소이다.
결국, 어떤 수단을 통하든간에 IMF는 해당국의 경상수지가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을 정도로 강도 높은 긴축정책을 요구하게 된다. 긴축정책의 결과 해당국은 저성장, 심지어는 마이너스 성장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성장률 둔화에 따라 기업과 금융기관도 고통을 받겠지만,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저성장의 고통은 대부분 실업률 상승과 실질임금 인하를 통해 노동자에게 전가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화이트안에 따라) 국제수지 불균형의 조정책임을 전적으로 적자국이 지도록 만든 IMF체제의 궁극적 효과이다. 선진국 자본, 특히 미국 자본의 이익을 위해 후진국, 그 중에서도 후진국 노동자들의 희생이 강요되고 있고, IMF는 그 선봉에 서 있는 것이다.
나) 구조조정 프로그램 : 자유화정책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성격은, 구제금융 대상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후진국의 경제질서와 IMF가 대변하는 미국의 경제질서 사이의 차이를 확인함으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다.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이란 미국의 경제질서를 세계경제질서로 확산시키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후진국들은, 정부가 의욕적인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거나 또는 여타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이유에 의해, 대부분 시장기능이 매우 취약하며 정부가 시장기능의 상당부분을 대신하고 있다. 한걸음 더나아가 선진국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후진국이란 개념은 애초부터 시장이 불완전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지칭하는 것이다. 반면, 미국은 어쨌든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시장경제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미국의 관점에서 후진국 경제질서의 취약점을 파악하고 그 해결책을 강요하는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당연히 자유화정책을 기본적인 내용으로 할 수밖에 없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자유화정책의 또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구제금융을 받는 후진국 경제질서의 특징에 따라 부과되는 자유화정책의 유형도 매우 다양하다. 우선, 외환위기를 겪은 나라의 많은 경우에서 자국의 통화가치를 과대평가하는 방향으로 환율제도를 경직적으로 운영하였는데, 이것이 경상수지의 적자를 누적시키는 중요한 한 요인이 되었다. 이 경우 IMF는 예외없이 환율자유화의 명목하에 변동환율제도로의 이행을 강제하는데, 그 결과 해당국 통화의 환율은 대폭 상승하게 된다(통화가치 하락). 환율상승은 수출기업의 가격경쟁력을 회복시킴으로써 경상수지 적자를 개선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다른 한편 원자재·자본재의 수입가격을 상승시킴으로써 단기적으로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촉발한다. 명목임금의 상승은 억제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면 결국 노동자의 삶의 조건은 크게 악화될 수밖에 없다.
금융시장은 통상 후진국의 시장 중에서도 그 불완전성이 가장 심각한 부분인 것으로 지적된다. 균형금리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서 규제되는 공금리, 제도금융시장과 사금융시장으로 이원화된 금융시장, 자금에 대한 항상적 초과수요에 따른 (특히 공기업과 일부 대기업에 편중되는) 선별적 정책금융체계, 금융기관에 누적된 천문학적 액수의 부실채권 등등의 현상은 IMF의 관점에서는 비효율과 불합리의 전형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금융산업에 대한 IMF의 구조조정은 한결같이 상당수의 금융기관을 파산처리함으로써 부실채권을 강제정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금융산업에 대한 대대적인 규제완화, 즉 금융자유화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은, 금융긴축 효과 및 급속한 인플레이션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단기적으로 금리를 치솟게 할 것이다. 그 결과 차입의존도가 높은 기업, 그리고 금융기관에의 접근 가능성이 낮은 중소기업의 파산을 부채질하고, 실업률을 높이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이상에서 언급한 외환시장·금융시장의 왜곡상은 (경제개발 목적에 의한 것이든 또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목적에 의한 것이든 간에) 정부가 경제활동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것에 따른 결과이다. 특히 대부분의 후진국에서 정부의 경제개입은 공기업의 형태로 나타난다. 따라서 IMF의 자유화정책은 정부의 경제활동을 축소하고 또 관료제적 비효율성을 제거한다는 명목하에 공기업 민영화를 필수적으로 포함하게 된다. 그런데, 공기업 민영화는 또다른 목적(사실은 보다 중요한 목적)을 추구하는 수단으로도 이용된다. 즉 공기업 민영화는 안정화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재정긴축의 수단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노동운동의 중요한 동력 역할을 하는 공기업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는 결정적 수단이 되기도 한다.
같은 후진국이라고 하더라도 각국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노사관계의 특성은 크게 다르다. 따라서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서 노사관계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나라마다 차별적이다. 그러나 노사관계 부분이 크게 취급되지 않는 경우는 그것이 취급되지 않아도 될만큼 노동운동 세력이 미약하다는 것을 반영한 뿐이다. 필요한 경우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임금수준의 차원을 넘어,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명목하에 노사관계 전반에 걸쳐 기업의 자유를 확대하는 내용을 담게 되며, 그 결과는 고용불안 심화와 근로조건의 악화이다.
한편, 선진국 자본의 활동영역이 국경을 넘어 확대됨에 따라, 특히 80년대 이후 국제화·세계화 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단순히 후진국 내부의 자유화 차원에 머물지 않게 되었다. 자유화정책은 대외적 자유화, 즉 개방화를 필수적으로 포함하게 되었으며, 최근에 올수록 대외개방 측면에 보다 강조점을 두게 되었다. 예를 들어, 외환자유화는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인하는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었고, 금융자유화의 경우 그 초점이 금융시장·자본시장 개방으로 이동하였으며, 금융기관 M&A나 공기업 민영화에서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외국인의 참여를 적극 권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처럼 개방화를 핵심요소로 하는 자유화정책을 후진국에 강제함으로써 결국 IMF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선진국 자본의 축적영역을 더욱 확대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후진국 경제질서의 특징, 즉 사용자-노동자간·대-중소기업간·중화학-경공업간·도-농간에 2중구조가 항존하는 상태에서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의한 자유화의 충격이 주어진다면, 그 결과 역시 2중적일 수밖에 없다. 기득권을 가진 쪽은 확대된 자유를 새로운 기회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지배를 받아 온 쪽에는 파탄과 몰락의 자유만이 주어질 것이다.
(2) 한국에 부과된 IMF 구제금융의 조건 및 그 파급효과
가) 긴축정책과 부실 금융기관 정리대책
앞에서 살펴본 IMF 구제금융에 따른 조건의 일반적 내용은 대부분 우리나라에도 적용되었다(<표 3> 참조). 특히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 정부와 기업, 그리고 국민들을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외환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한 단기대책이 (가혹할 정도로) 강도 높게 요구되었다는 사실이다.
최근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겪게 된 표면적인 원인은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와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누적에 있다.
우리나라는 1996년에 237억 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였는데(GNP대비 4.9%), 이것은 GNP대비 비율로만 본다면 약 7%의 기록한 태국에 이어 세계 2위에 해당된다.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경상수지 적자는 외채를 누적시켰고, 특히 1년이내에 상환하여야 할 단기외채가 총외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함으로써 외환시장은 조그만한 충격에도 금방 혼란에 빠질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표 3> IMF 구제금융에 따른 한국의 양허안내용
구 분
내 용
거시
경제적
목표
◆GDP 성장률 : 98년 3%, 99년 잠재성장률 수준(약 5%)
◆물가상승률 : 5% 이하
◆경상수지 적자 : 98년 GDP대비 0.5% 이내(97년은 3%)
◆외환보유고 : 98년말까지 2개월분의 외환보유고 적립
구 분
내 용
정부
정책의
기본방향
◆재정·금융긴축을 통한 외환보유고 제고, 경상수지 적자 축소
◆투명·건전·시장중심적 금융질서 확립을 위한 금융산업 구조조정
◆경제의 위험 분산을 위한 기업의 차입의존도 축소
통화 및
환율정책
◆목표 : 물가상승을 억제하기 위한 긴축기조 유지
◆절차 : IMF스탭과 협의하여 집행
◆내용 : 물가목표에 맞추어 총유동성(M3) 증가율 인하, 단기적으로 고금리 허용, 변동환율제 유지
재정정책
◆목표 : 재정적자 축소와 (부실채권정리에 따른) 금융부문 부담 완화를 위해 GDP의 1.5%에 해당하는 (조세와 지출 양 측면의) 재정조정 실시
◆세수 확대 : 원유세와 특별소비세 인상, 기타 간접세의 과세기준 확대
◆지출 축소 : 경상경비 축소 및 SOC투자 등의 자본지출 축소
금융산업
구조조정
◆기본방향 : 명확하고 엄격한 퇴출정책, 강력한 시장과 감독정책, 경쟁촉진
◆퇴출정책 : 9개 부실 종금사 정리, BIS기준(위험가중 자기자본비율 8%)에 미달하는 은행은 증자나 M&A를 통해 구조조정
◆예금보장 : 2000년말까지만 전액 보장, 이후부터는 소액예금자만 보호
◆회계의 투명성 제고 : 외국 회계법인이 대형금융기관의 회계장부 감사
◆통합금융감독기구 설립 : 독립성 확보 -+- (*두 법안의 입법과정에서 IMF가
◆한국은행 독립 : 물가안정을 주임무 -+ 자신의 의견을 강력 반영할 계획*)
◆개방 : 98년 중반까지 외국은행 자회사 및 외국증권사 현지법인 설립 허용
무역 및
자본
자유화
◆무역자유화 : 무역관련 보조금, 수입선 다변화제도, 규제적인 수입허가제 폐지에 관한 일정표 제시
◆자본자유화
- 외국인 주식매입한도 : 종목당 한도(현 26%)를 97년말 50%, 98년말 55%로 확대, 1인당 한도(현 7%)를 97년말 50%로 확대
- 채권시장 : 98년 2월까지 단기자금시장 및 회사채 시장 개방 확대
- 기업의 해외차입 : 98년 2월말까지 제한 폐지
기업지배
구조 및
기업구조
◆ 기본방향 :
- 금융개혁을 통해 재벌의 은행 차입의존 경영행태 쇄신
- 기업경영 투명성 제고 : 기업의 위험도에 대한 평가를 향상
◆기업경영 투명성 제고 조치
- M&A에 대한 규제 대폭 완화
- 기업공시 철저 : 상장기업에 대한 국제적인 회계기준 도입 및 외부감사인에 의한 감사 의무화, 결합재무제표 도입, 계열사간 상호지급보증 폐지
- 파산관련제도 : 부실기업에 대한 정부보조나 건전기업과의 강제합병 금지
노동시장
◆노동시장 유연화 : 정리해고 제한 완화, 파견근로제 도입
◆고용보험제도 강화
기타
◆금융실명제 : 현행 골격 유지
◆통계자료의 투명성 제고 : 외환보유고, 금융기관의 경영상황, 통합재정수지 등에 대한 자료를 IMF기준에 맞추어 98년 3월말까지 공표
실행기준에 대한 평가
◆98년 1월에 추가적인 양적 실행기준 마련
◆98년에는 3월말, 6월말, 9월말로 맞춰진 실행기준을 3번에 걸쳐 분기별로 검토
출처 : "IMF [한국경제 극비 보고서](전문)", 조선일보 1997.12.8일자 12면에서 정리
그 충격, 그것도 엄청난 규모의 충격이 바로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문제로부터 터져나왔다. 우리나라 금융산업의 부실화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고, 사실 우리나라 사람보다도 외국인이 더 잘 알고 있는 문제이다. 이런 와중에 올해 들어서만 한보,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 뉴코아, 쌍방울, 해태, 한라 등의 재벌기업들이 부도가 나거나 사실상 부도상태에 직면함으로써 금융기관들은 회생불가능할 정도의 부실채권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이에 따른 대외신인도 하락으로 차입외화의 기한갱신이 어려워지면서, 특히 대부분의 종금사들은 사실상 외화부도상태에 직면하였다. 그 중 9개 종금사에 대해서는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졌으며, 12월말까지 충분한 수준의 구조개선 계획을 제출하지 못하는 종금사는 영업취소될 예정이다.
은행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다. 은행감독원의 규정에 의하면 은행의 여신은 건전성 상태에 따라 정상·요주의·고정·회수의문·추정손실 등의 5단계로 분류된다. 이 중에서 최근까지도 '회수의문'과 '추정손실' 부분에 대해서만 공식통계가 발표될 정도로 은행의 부실채권 문제가 은폐되다가, IMF 구제금융 신청을 계기로 '고정' 부분까지의 자료가 공개되었다. 이에 따르면 1997년 9월말 현재 국내은행 전체의 부실채권 규모는 28.2조원으로 총여신의 6.2%에 달한다. '요주의' 부분까지 포함하면 총여신의 15% 정도가 부실채권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국은 '요주의'까지를 포함한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미국 은행들의 평균 부실율이 2∼3%인 것과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 은행의 부실화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 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IMF가 부과한 단기대책의 내용은 단호한 것이었다. 우선, 경상수지 적자를 감축하고 외환보유고를 확대하기 위한 대대적인 안정화 프로그램, 즉 재정·금융상의 긴축정책이 강제되었다. 이에 따라 3% 이하의 GDP 성장률, 5% 이하의 물가상승률이 1998년의 거시경제적 목표수치로 설정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우리나라는 상당기간에 걸쳐 저성장과 고실업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3%의 GDP 성장률 하에서는 실업자 수 110만명에 실업율이 5%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IMF는 부실 금융기관의 정리를 위해 (정부가 금융안정대책으로 내놓았던 부실채권정리기금에 의한 인수, 국내 금융기관간의 M&A 차원을 넘어) 상당수 금융기관의 폐쇄 및 외국인에 의한 적대적 M&A의 허용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부실 금융기관 정리대책은 대외적 외환위기(currency crisis) 사태를 대내적 신용공황(credit crisis) 상황으로 전환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5.16 쿠데타 직후의 증권파동 이후 최초로 증권회사(고려증권)가 파산하였고, 재계 12위 재벌인 한라그룹이 부도가 났으며, M&A 대상으로 소문이 난 몇몇 은행에서는 예금인출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기업과 금융기관의 악순환적 연쇄부도라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이에 대해서는 4절에서 다시 논의할 것임).
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정책
그런데, 긴축정책·부실 금융기관 정리대책의 파급효과에 못지 않게 필자가 우려하는 바는 우리나라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IMF가 제시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가져올 영향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먼저 한국 경제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 IMF가 어떠한 인식을 갖고 있는가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 IMF는 "한국의 금융위기는 (정부의) 신용할당, 기업과 은행간의 유착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기업과 은행간의 유착은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를 너무 쉽게 결정하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라고 함으로써 관치금융과 재벌의 금융독점을 금융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지적하였다.
(필자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는) IMF의 이러한 인식은 그 당사자인 우리나라 정부와 재벌의 인식과는 극단적인 대조를 보이는 것이다. 정부는 IMF 실사단과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사실은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의 실물경제적 기초(Fundamentals)는 건전하다고 강변하면서, 현재의 위기는 단기적인 외환수급 불균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IMF의 자금지원이 시작되면 조만간 진정될 것이라는 인식을 버리지 않았다. 재벌 역시 "깡드쉬 IMF 총재가 한국의 재벌을 경제파탄의 주범으로 꼽고 포기해야 할 낡은 경제시스템으로 규정한 것은 한국 실정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오만하고 위험한 발상이다"(공병호 전경련 부설 자유기업센터 소장)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면서, 민족주의적 감정에 불을 지르고 있다.
따라서 필자가 우려하는 바는, 한국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IMF의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정책의 방향에 있다. 즉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시장의 자유, 따라서 소수 기득권층의 자유(그것이 미국·일본의 초국적 자본이든 또는 국내의 재벌이든 간에)만을 확대하는 정책이다. 우리가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책을 강구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외세에 의한 것이라는 감상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이기 때문이다.
IMF가 우리나라에 부과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크게 금융산업, 재벌체제, 그리고 노동시장에 대한 대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금융산업에 대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전술한 부실 금융기관 정리대책과 관련된 것으로, 금융기관 회계의 투명성 제고를 통한 퇴출정책 강화 이외에도) ① 주식·채권시장 개방 확대 및 외국금융기관의 국내진입 조기 허용 등의 대외적 자유화정책(개방정책)과 ② 행정부로부터 독립된 중앙은행 및 통합금융감독기구의 설립으로 요약되는 대내적 자유화정책(관치금융의 해소)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금융산업 구조조정 방향은 IMF의 신자유주의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금융시장과 금융산업 전반에 걸친 개방 문제는 한·미간의 쌍무협상에서나 우리나라의 OECD 가입협상에서 최대의 쟁점이 된 사항들이다. 대부분의 사항에 대해 이미 개방일정이 잡혀 있었지만, 이번의 IMF 구제금융을 계기로 그 개방시점이 크게 앞당겨지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금융부문의 낙후성을 감안할 때 급격한 개방정책은 초국적 금융자본에 의한 시장잠식을 야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상당기간동안 긴축금융이 불가피한 현 상황에서 국내외 금리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기 때문에 단기자금시장으로의 투기적 핫머니 유입에 따른 혼란이 우려되고 있다. 또한 1997년말까지 외국인 주식투자의 종목당·1인당 한도(현재는 각각 26%, 7%)를 50%로 급격히 확대하도록 강제되어, 외국인의 국내 금융기관·기업에 대한 적대적 M&A 위협이 현실화되었다.
한편, 1997년초 김영삼 대통령의 금융개혁선언 이래 진행되어 온 금융개혁위원회의 작업 중에서 최대 논란거리였던 중앙은행제도 및 금융감독체계 개편 문제도 IMF의 손을 거쳐 일단락될 전망이다. 즉 IMF는 이 두개의 법안 내용에 자신들의 입장을 반영시키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IMF의 입장은 '물가안정을 주임무로 하는 한국은행의 독립성 확립,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된 통합금융감독기구의 설립'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최종적으로 어떻게 결말을 맺게 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IMF 구제금융을 요청하기 직전까지도 금융감독체계의 개편 방향과 관련하여 한국은행과 재경원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빚어졌었던 상황이고, 또한 통합금융감독기구를 어디에다 설치할 것인가는 정부조직 특히 재경원의 조직개편과 관련된 문제인만큼 IMF와 우리나라 정부 사이의 추후협상 결과(또는 이미 체결된 협상의 비공개 부속서에 포함되었지도 모르는)에 크게 의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MF가 통합금융감독기구의 독립성·자율성을 상당한 정도로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통합금융감독기구를 재경원 산하에 두려는 재경원의 의도에 대해 제동을 거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다만, 결국 IMF의 개입에 의해 이 문제가 처리되게 됨으로써 한국은행과 3개 감독원이 그동안 주장해왔던 금융감독기구 통합 반대 입장 역시 묻혀버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특히 금융기관간 M&A에 따라 겸업화 현상이 가속화될 것으로 예측되는데, 이것은 금융감독기구의 분리논리보다는 통합논리의 설득력을 높이는 요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금융감독기구의 통합을 어쩔 수 없는 제약조건으로 전제한다면, (그 통합금융감독기구를 재경원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핵심요소로 하는) 통합금융감독기구의 독립성 확보 문제가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 문제는 한국은행의 독립성 확립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한국은행과 통합금융감독기구 사이의 연결통로를 개설하는 것은 물론, 한국은행이 통화정책을 수행함에 있어 협의의 은행기관 뿐만 아니라 제2금융권과 외환업무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법 개정이 이루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 IMF가 한국의 재벌체제를 낡은 시스템으로 규정함으로써 재벌해체가 우리 사회의 새로운 화두로 던져졌다. 물론 재벌은 이에 대해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강력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IMF의 요구사항이 완벽하게 집행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결코 재벌을 해체하는 데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IMF가 요구한 것은 ① 금융산업 개편을 통한 재벌기업의 차입의존적 경영행태 쇄신과 ② 상호지급보증 폐지, 결합재무제표 공표 등을 통한 기업경영 투명성의 제고일 뿐이다. 이러한 조치만으로 해체될 재벌이라면 이미 오래전에 해체되었을 것이다.
사실 차입의존적 경영행태 쇄신과 기업경영 투명성 제고는 IMF가 최초로 제시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은 지난 80년대 후반이래 정부가 끊임없이 만들어냈던 재벌정책들 속에 항상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현 김영삼 정권이 1996년 4.11 총선 직전에 제기하였던 신재벌정책, 그리고 최근에 발표되었던 [21세기 국가과제] 속의 '기업경영 투명성 제고 및 기업지배구조의 선진화'의 핵심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90년대 들어 재벌의 힘이 정부의 힘을 능가해버린 상황 속에서 김영삼 정권이 제기하고도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던 과제를 IMF가 다시 한번 제시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과거에 김영삼 정권이 제기하였던 재벌정책이나 현재 IMF가 요구하는 있는 구조조정 정책이나 모두 진정한 의미의 재벌해체를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선진국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너무나 후진적인 재벌들의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번 IMF의 요구는 재벌들의 힘에 억눌려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던 시장기능을 활성화하는, 즉 시장에 보다 많은 자유를 부여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적 자유화정책의 산물이다.
IMF는 김영삼 정권보다 훨씬 큰 강제력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에, IMF의 요구는 재벌체제의 후진성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며, 이를 현실화하는 것은 진보진영의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자유는 소수 기득권층의 자유에 불과하고, 재벌이 우리 사회의 핵심 기득권층에서 탈락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신자유주의의 속성상 재벌총수의 소유권 및 이에 기초한 경영권을 직접 제약하는 정책을 IMF가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IMF의 구조조정 정책에 의해 시장의 자유가 확대됨으로써 그동안 재벌총수의 경영권 행사를 제약하였던 정치·사회적 요인(특히 재벌의 경제력 집중에 대한 비판)이 급격하게 힘을 잃게 되는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최근 계속된 경제위기와 IMF의 구조조정 요구로 인해 부실 재벌들은 도산할 수밖에 없겠지만, 여기서 살아남는 재벌들, 특히 상위 거대재벌들은 부실기업 인수과정을 거쳐 그 힘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대우그룹의 쌍용자동차의 인수를 계기로 가속화될 자동차산업 구조개편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결론적으로, IMF의 요구로 인해 재벌의 후진성은 크게 개선될 것이다. 그러나 구조조정 과정이 신자유주의적인 IMF에 의해 주도되거나 또는 심지어 수구적인 재벌·차기정권에 의해 왜곡된다면, 그 결과는 재벌해체가 아니라 보다 세련화된 거대독점자본의 탄생일 뿐이다. 구조조정 과정에 대한 노동·진보진영의 적극적인 대응이 요구되는 근본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이에 대해서는 4절에서 다시 논의할 것임).
셋째, 금융산업 구조조정과 재벌문제에 대해 IMF가 견지하였던 신자유주의적 원칙은 노동시장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즉 IMF는 대법원 판례에 의해 현재 시행 중인 정리해고제의 요건을 완화하고 파견근로제를 새로 도입함으로써 노동시장을 유연화할 것을 명시적으로 요구하였다. 이것은, 긴축정책 및 부실 금융기관 정리대책의 효과에 더하여, 고용불안을 더욱 심화시키고 결국 노동대중의 삶을 파괴할 것이다. 현 경제위기의 근본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IMF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통해 시장의 자유, 특히 기업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4. IMF 정책처방의 문제점 및 대안
IMF와의 협상이 타결되고 실제 자금지원이 시작된 현 시점에서도 한국 경제의 위기상황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최근의 경제상황은 전형적인 신용공황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이에 편승하여 재벌들은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적 감정을 선도함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를 호도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량해고와 임금삭감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전가하려는 구조조정 전략을 획책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과 관련하여 이하에서는 IMF의 정책처방이 초래한 현실적 문제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이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보기로 한다.
(1) 과도한 긴축과 신용공황
외환보유고를 확충하고 경상수지 적자를 개선하기 위한 유일한 대책으로서 긴축을 강요하고 있는 IMF의 정책처방은, 노동대중에 대한 파괴적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고, 구조조정조차 지연시키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실업보험 등의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고, 또한 위기극복을 위한 전략의 수립과정에 대해 노동자들의 실질적 참여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시행되는 과도한 긴축정책은 구조조정에 따른 고통을 대부분 노동자들에게 전가함으로써 정치적·사회적 불안을 야기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기업의 생산성도 향상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의 한국 경제는 긴축정책이 본격화되기도 전에 신용공황 국면으로 급전직하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9개 종금사의 영업정지, 고려증권의 부도, 그리고 IMF가 일부 은행에 대해서까지 구조조정을 요구했다는 유언비어(?) 등으로 인해 자금흐름이 경색단계를 넘어 거래 자체가 중단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기업-금융기관의 악순환적 연쇄부도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한국 경제가 이른바 구조조정을 통해 새로운 도약을 하기는 커녕 그대로 주저앉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사태가 이처럼 악화된 직접적 원인은 물론 현 정부의 정책적 무능에 있다. 기아사태가 발생했을 때 존재하지도 않는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용공황이 눈앞에 보이는 현 순간에도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시장이 존재하지 않거나 불완전할 때 경제활동에 개입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특히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핵심인 금융질서가 붕괴될 위험에 직면하였을 때 이를 지탱하는 것은 정부의 절대적 의무이며, 이것은 IMF를 포함한 신자유주의자들조차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부가 개입하는 경우에도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투명성과 한시성이 그것이다. 즉 정부가 개입하는 방식이 투명해야 하며, 개입 기간은 위기극복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으로 한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은 구제금융을 받고 있는 현 상황에서 IMF를 납득시킬 수 있는 기본 조건이며, 무엇보다 먼저 대국민 신뢰성을 회복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애초에 구조개선 명령을 받았던 종금사 리스트와 IMF와의 협상과정에서 전격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던 종금사 리스트가 일치하지 않는 식의 사태가 계속되는 한 그 어떠한 정부정책도 효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정부가 개입을 통해 보호하고자 하는 대상의 우선순위를 변경하여야 한다. 60년대이래 오늘날까지 정부의 보호대상은 언제나 차입자, 특히 재벌들이었다. 물론 관치금융이 지속되는 상황하에서 금융기관은 절대 도산하지 않는다는 믿음(不倒 신화)이 존재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IMF가 지적하였듯이, 정부에 의해 신용할당이 이루어지고 재벌과 금융기관이 유착된 구조는 외국 금융기관들(해외 저축자)에게 신뢰감을 줄 수 없었고, 결국 투자철수와 투기적 외환공격으로 이어졌다. IMF의 자금지원을 받음으로써 이제 대외적 외환위기(currency crisis) 사태는 수습될 전망이 생겼지만, 대신 금융기관의 不倒 신화가 깨짐으로써 국내 저축자의 신뢰가 붕괴되는 대내적 신용공황(credit crisis) 상황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신용공황 위험에 직면하여 정부가 보호해야 할 첫번째 대상은 국내 저축자(즉 일반 국민)가 되어야 한다. 위기상황에서 차입자, 특히 재벌만을 보호하려는 임기응변식 대책이 어떠한 파국적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이미 생생하게 경험하였다. 부도방지협약이 결국 부도촉진 효과만을 낳았던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험에 비추어볼 때, 최근에 재벌과 차기 대권 후보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였던 금융실명제 유보와 차입금상환 유예 대책은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국내 저축자들의 신뢰를 더욱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언제 예금인출이 정지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금융기관에 돈을 맡길 저축자는 어디에도 없다. 이 때 2000년말까지 모든 예금의 원리금상환을 전액 보장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따라서 신용공황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부실 금융기관 정리대책을 수정하여야만 한다. 성업공사내 부실채권정리기금이 부실채권을 떠안는다는 조건하에, 국제기준에 미달하는 금융기관은 무조건 폐쇄 내지 구조조정을 요구하겠다는 IMF의 원칙이 바로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금융기관들을 위축시키는 원인이다. 물론 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현 상황에서 부실 금융기관을 무작정 살려둘 수만도 없다. 따라서 필자가 생각하는 방식은, 폐쇄가 불가피한 금융기관의 경우 모든 자산·부채를 정부가 설립한 가교은행(bridge bank)에 이관시킴으로써 그 정리절차가 마무리될 때까지 최소한의 영업을 계속하는 것, 특히 일반 국민들의 예금인출이 언제나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근원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한 금융기관의 경우는 제일·서울은행의 예에서와 같이 정부의 출자를 통해 공기업화한 후 (M&A 등을 포함한) 필요한 조치를 마무리하여야 한다. 이 때 IMF가 요구한다면, 민영화 시점을 명확히 약속하는 것도 한 방편이 될 것이다.
이상의 방식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정부가 뒷짐진 채 신용공황을 방치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2) 경영투명성 제고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재벌해체
전술한 바와 같이, 재벌에 대한 IMF의 구조개선 요구사항은 차입의존적 경영행태 쇄신과 기업경영 투명성 제고일 뿐 진정한 의미의 재벌해체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IMF와 그 배후의 미국이 대변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는 소유권(및 이에 따른 경영권)의 신성불가침성을 전제로 하면서, 시장에서의 투명한 경쟁(이른바 시장규율(market discipline))이 소유권의 남용을 막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효율성 증가를 유도한다는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프로그램 내에는 그 속성상 재벌총수의 소유경영권 독점문제를 직접 해결하고자 하는 적극적 대책이 포함될 수 없으며,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것이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나 한국의 재벌체제에서 총수 1인이 소유경영권을 독점하는 문제의 심각성은 경영투명성 제고라는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견제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고 있다. 재벌에 대한 기업지배권 시장(market for corporate governance)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부실 재벌이 아닌 한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 확대에 따른 적대적 M&A 가능성도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못한다.
재벌의 자본구성 현황을 보면 그 천민성은 극에 다다른다. 1996년 4월 현재 30대 재벌의 총자산 340조원 중 자기자본은 70조원에 불과하다(자기자본비율 = 20.5%). 자기자본 중 재벌총수와 그 가족이 직접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약 7조원에 지나지 않지만, 24조원에 이르는 계열사간 상호출자에 의해 재벌총수는 자기자본 70조원의 44.1%인 31조원을 직간접적으로 지배하고 있다(총수 및 특수관계인 지분율 10.3% + 계열사 지분율 33.8% = 내부지분율 44.1%). 결국 재벌총수는 총자산 340조원의 2%인 7조원에 대한 소유권을 기반으로, 39조원의 지분을 소유한 외부주주의 소유권 행사는 말할 것도 없고, 270조원의 부채자금을 제공한 일반 국민들의 소유권 행사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2%만으로 100% 전체에 대한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관철시키는 재벌체제가 유지되는 한 경제위기는 계속될 것이며, 이에 따른 고통은 항상 노동자와 금융기관(결국은 금융기관에 저축한 국민 전체)에게 전가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재벌해체는 기업경영 투명성 제고 차원을 넘어 총수 1인의 소유경영권 독점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는 대책을 포함할 때에만이 실현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총수 1인의 소유경영권 독점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은, 2차 세계대전 직후 맥아더 사령부가 일본 재벌을 해체한 것과 같이, 재벌총수가 소유한 지분을 몰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아무리 IMF신탁통치가 시행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시대적 상황하에서는 실현가능성이 크지 않다.
따라서 필자가 생각하는 방식은, (종업원 지주제를 포함한) 강력한 소유분산 정책에 의해 전문경영인 체제를 확립하는 동시에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기업경영의 전략적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는 것이다. 이해관계자 중에서도 특히 기업내부자로서는 노동자대표(또는 노조), 기업외부자로서는 채권자이자 대주주인 금융기관(기관투자가)의 경영 참여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으로써 총수 1인을 위한 재벌기업이 다수의 이해관계자에게 봉사하는 국민기업으로 전환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사항이 있다. '재벌이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른바 국경없는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재벌체제는 어쩔 수 없는 필요악 아닌가?'라는 재벌 자신과 정부의 변명이 그것이다. 이 변명에 다수의 노동자들이 체념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재벌해체라는 진보진영의 대안이 기업해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모든 대기업을 중소기업으로 만들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거대한 규모의 대기업도 필요하고 중소기업도 필요하다. 자동차산업의 경우, 최종조립기업은 수십만평의 공장에 수만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거대기업일 수밖에 없지만,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수천, 수만개의 부품은 작은 규모의 중소기업이 공급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효율적이면서 공평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가이다.
다른 한편,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재벌이 필요악이라고 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쟁력 있는 개별기업으로서의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이지, 삼성그룹 전체나 현대그룹 전체가 아니다. 삼성전자가 1994년과 1995년에 얻은 수조원의 순이익은 삼성전자의 반도체 투자를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 삼성전자의 자금력과 대외신용도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삼성자동차 투자에 전용되는 것은 국제경쟁력 향상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건희 회장을 제외하고 삼성전자의 주주 중 그 누구도 이에 동의한 바 없다. 그 결과는 삼성전자 자체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기아자동차의 몰락에 따른 혼란에서 보듯이, 국민경제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룹내부 경영의 측면에서나 국민경제 전체에 대해서나 독재를 자행하고 있는 재벌을 근원적으로 혁신하지 않고서는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자유를 박탈당한 노예의 상태로 전락할 것이며, 치열한 국제경쟁에서도 패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재벌체제의 근원적 혁신은 형평성의 측면에서나 효율성의 측면에서나 절박한 과제이다.
5. 결론
긴축정책과 자유화정책을 핵심으로 하는 IMF의 정책처방은 특히 노동자계층에 대해 파괴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또한 IMF의 정책처방이 실제 집행되는 과정에서 재벌과 차기 정권에 의해 수구적 방향으로 왜곡될 위험성도 매우 농후하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인 IMF로부터도, 수구적인 재벌과 차기 정권으로부터도 노동자와 진보진영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수구적인 재벌과 정치권을 근원적으로 혁신함으로써 진보적 경제사회질서를 창출하는 과제는 노동자와 진보진영의 것일 수밖에 없다.
현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도 고통을 부담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경제적·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노동자들 자신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근원적 혁신을 통해 재벌과 정치권도 뼈를 깎는 고통을 부담할 것을 요구하는 노동자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 '참여의 권리, 그리고 이에 따른 책임의 분담.' 이 양자가 병존할 때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질 것이며, 우리는 희망의 미래사회로 나아가는 실천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권리와 책임이 병존하는 미래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노동자·민중의 경제적·정치적 주장이 반영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즉 민주·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진보에 의해 견제되지 않는 보수는 수구에 불과하며, 올해 분명히 확인했듯이 수구권력은 위기극복을 위한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고 오히려 위기를 심화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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