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에 무슨 요령이 있겠나 싶지만 전혀 요령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요령을 그저 객관식 위주의 것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에 논술에는 요령이 없다고 말할 뿐이다. 세상만사 요령이 없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선 대학에서 논술 시험을 채점할 때 어떤 기준으로 채점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이를 중심으로 다음 열 가지 정도의 요령을 음미해 보자.
(1) 무슨 말을 하는 지가 분명하도록 하라.
논술 연습을 많이 했다고 해서 자신 없는 이야기를 함부로 늘어놓아서는 절대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채점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채점하는 사람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수많은 학생들의 답안을 찬찬히 정독하면서 읽기가 쉽지 않다. 그만그만한 수준의 답안들을 읽고 있노라면 지겹기도 하고 힘들기도 할 것이다. 대충 읽게 되면 그만큼 정수도 대충 어림짐작으로 주게 된다. 그런데 만약 답안의 문장이나 단락의 내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분명하지 않으면 채점자는 아예 귀찮아질 수도 있다. 읽기가 어렵고 무슨 말을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으면 당장 “아니, 이 학생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냅다 낮은 점수를 주기 쉽다.
우선 읽기 쉽도록 글을 써야 한다. 쉽게 읽혀진다고 해서 내용이 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용의 수준이 높은지 낮은지는 그 다음 문제다. 아무리 내용의 수준이 높아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를 포착하기 어려운 글은 절대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내용의 수준이 낮아도 분명하게 자기 의사를 개진한 글이 내용의 수준은 높은 듯한데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개진하지 못한 글보다 좋은 점수를 받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자신 있는 내용을 떠올려야 한다. 어디서 본 듯하다거나 그 때 공부한 것이 참 그럴 듯 했던 것 같은데 라는 식으로 어렴풋한 기억이나 지식을 활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대목대목의 모든 내용들이 최대한 자신만만하게 제시할 수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크게 논리에 어긋나지도 않고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창의성이나 참신성을 높이기 위해 감당할 수 없는 내용을 억지로 담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창의성이나 참신성보다 우선하는 것이 물 흐르듯이 서로 어긋남이 없이 쉽게 읽혀지는 논리성임을 명심하라.
(2) 개요 짜기는 완성된 문장으로 하라.
개요 짜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항목만을 열거하는 식의 개요가 있고, 각 항목을 아예 완성된 문장으로 풀어써서 만드는 개요가 있다. 개요를 짜는 단계에서 아예 완성된 문장으로 하나하나 써야 한다. 왜냐 하면 완성된 문장으로 써 보지 않고 그저 복합 명사형으로 항목만을 적어 보는 것만으로는 실제 본문을 써 나갈 때 글이 될지 안 될지를 확인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항목 형태로 개요를 짜 놓고서 성급하게 본문 쓰기에 들어가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허둥대기 일쑤다. 개요 짜기 단계에서 미리 완성된 문장으로 써 놓아도 잘 되지 않으면 자신 없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그럴 경우 자신 있게 문장으로 써낼 수 있는 다른 유사한 내용으로 바꾸어야 한다.
완성된 문장으로 개요를 짜 놓으면 본격적으로 본문 쓰기에 들어갔을 때 글을 쓰기가 훨씬 편하다. 물론 개요 짜기에 신간이 더 많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완성된 문장으로 개요를 다 써 놓으면 본문을 반 이상 쓴 셈이 되기 때문에 결국에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셈이다.
문제는 문장 개요에서 완성된 문장으로 써 놓은 것들을 어떻게 더 늘리고 보완하면서 요구하는 답안 분량을 알차게 작성해 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완성된 문장으로 개요를 작성하게 되면, 개요를 작성할 때 정확하게 무슨 뜻에서 무슨 의도로 그렇게 썼는가를 잘 알기 때문에 본 답안을 만들어 내는 데로 훨씬 더 유리하다.
(3) 서론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논술에 돌입한다고 생각하라.
서론은 잔소리하는 곳이 아니다. 많은 학생들이 서론의 첫 문장, 그것도 첫 글자를 무엇으로 시작해야 하느냐로 고민을 한다. 그러다가 은근슬쩍 우회로를 찾아 부드럽게 ‘폼’ 잡으면서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 내용이 논제와 직접 관련되는 것이면 다행인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말부터 끄집어내는가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채점자 또는 글 읽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들면 안 된다. 아예 서론에서부터 논제에 직접 공격해 들어가면서 써간다고 생각하고 서론을 시작해야 한다.
예컨대 “공자의 인이 갖는 의미를 현대 사회에 비추어 논하라.”라는 문제가 주어졌다고 해 보자. 어떤 학생의 경우, “세상에는 많은 사상가들이 있다. 어떤 사상가는 사랑을 외치고, 또 어떤 사람은 이성적인 지혜를 주장한다. 그 중 공자는 특별히 인을 주장했다.……”라는 식으로 서론은 시작한다. 이런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는 하나마나한 이야기일뿐더러 이미 문제에도 주어져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적 심성을 요구한다. 그런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하고, 일탈이나 소외, 탈(脫)도덕성을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런 현상은 서구의 사상이나 문화 탓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찍이 동양의 현인인 공자는 인간이면 누구나 우선 사람다워야 한다는 뜻에서 인을 주장했다.……”라는 식의 서론이 더 참신하게 눈에 들어올 것이다. 직접 논제와 관련된 내용을 서론에서부터 문제 삼아야한다. 그래야만 채점자가 처음부터 “음, 뭔가 진지하게 글을 시작하는구먼.”하면서 그 글에 호감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4) 결론은 결코 장식이 아님을 유념하라.
서론도 그렇지만 많은 학생들은 결론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허둥댄다. 할 이야기를 다했는데 또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덧붙여 글을 마무리해야 한단 말인가 하면서 걱정한다. 그러면서 마치 결론이, 선물을 포장하고 난 뒤 예쁜 종이꽃을 붙이는 마지막 장식 작업인 양, 어떻게 하면 근사하게 끝마무리를 할까 걱정한다.
채점자가 수도 없이 쌓여 있는 채점해야 할 답안지를 보면서 지루한 표정을 짓는다고 가정해 보자. 경우에 딸서는 결론을 먼저 보고 난 뒤 글을 읽기고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결론에 핵심적인 이야기가 들어 있어야 한다. “핵심적인 이야기는 본문에서 다 했는데요.”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핵심적인 이야기를 결론에서는 ‘새롭게’ 제시해야 한다. 결론의 첫 문장은 마치 서론을 ‘새로운 방식으로’ 압축한 듯하고, 둘째, 셋째 문장은 본론의 이야기를 ‘새롭게’압축해서 제시해야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 문장에서 ‘마치 예리한 붓으로 용의 눈에 눈동자를 찍는 듯한’ 완성의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한다.
앞의 서론 이야기에서 제시한 논제(공자의 인(仁)의 현대적 의미)를 다시 예로 들어보자. 결론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가능할까?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현대 사회는 기계화, 자동화, 대량화, 대중화 등의 현상을 보이면서 비인간화를 가속화한다. 이럴 때일수록 공자의 사상을 무시하면서 계속 나가고 있다.” 어떤 학생의 결론이다. 아마도 이 학생은 본론에서 현대 사회의 특징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공자의 사상이 왜 필요한가를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결론만을 보아서는 어떤 방식으로 공자의 사상을 살려나가야 한다고 말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더군다나 마지막 문장은 결론의 요지와 상충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위에 언급한 학생의 결론은 “디지털 혁명과 인터넷 혁명에 의해 현대 사회는 정보화라는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너무나 빠른 속도로 사회 전체가 변하면서 사람들은 더욱더 자신의 인간다움에 대해 반성할 여유를 잃게 된다. 공자가 말한 인은 자기에 대한 철저한 도덕적인 반성을 전제로 한다. 이렇게 보면 현대 사회가 발전할수록 인을 강조한 공자의 사상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됨을 알 수 있다.”의 내용으로 고쳐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5) 문장을 만들 때 명사에 적절한 관형구를 덧붙여 근거를 제공하라.
논술을 읽으면서 글 읽는 사람이 글쓴이의 논리적인 힘을 느끼는 것은 세세한 데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그러려면 문장 하나를 보더라도 논리적인 힘이 실려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카프카의 심판을 제시문으로 주고서, 예컨대 “사회의 악과 개인의 도덕성의 관계를 논하라.”라는 논제를 주었다고 해 보자. 카프카의 심판은 주인공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른 채 어느 날 체포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체포하러 온 삶조차 자기가 이 사람을 왜 체포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그저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이런 분위기를 염두에 두면서 위 논제에 대해 쓴다고 해 보자. “사회의 악은 개인의 도덕성을 힘없이 만든다.”라는 문장과 “사회 구성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겨나는 사회의 악은 사회의 규율을 벗어나 살 수 없는 개인의 도덕성을 힘없이 만든다.”라는 문장을 비교해 보자. 뒤의 문장이 훨씬 더 내용도 있고 논리적으로 힘이 있어 보인다. 왜냐 하면 밑줄 친 부분들을 첨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저 ‘사회의 악’과 ‘개인’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악’과 ‘~한 개인’을 대립시켜 말하게 되면, 명사를 수식하는 관형어가 문장 전체의 근거 역할을 한다.
물론 이렇게 쓰면 문장이 길어져 나쁜 문장이 될 수 있다. 문장이 길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문장을 짧게 써 뜻이 불분명한 것보다 문장을 길게 써 뜻이 분명한 것이 더 낫다. 물론 위에서 고친 뒷 문장은 이렇게 멋지게 쓸 수도 있다. “사회의 악은 사회구성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겨난다. 그리고 개인은 사회의 규율을 벗어나 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악은 개인의 도덕성을 힘없이 만들기 일쑤다.” 이렇게만 쓸 수 있다면 굳이 명사 앞에 긴 관형어를 덧붙여 문장을 못 생기게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많은 학생들의 경우, 이런 식으로 문장을 쓰지는 못하다. 그저 별다른 근거도 없이 위 첫 문장처럼 어디서 외운 것을 그대로 옮겨 쓰듯이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명사 앞에 그 명사의 특징을 밝혀주는 관형어를 덧붙여 줌으로써 논리적인 힘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6) 단락을 바꿀 때 적절한 연결 문장 내지는 연결 어구를 덧붙여라.
한 단락에서 새로운 단락으로 넘어갈 때에는 반드시 그렇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실마리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얼마만큼 되는가에 따라 글의 통일성과 논리성이 결정된다. 사실 이렇게 할 수 있는 학생은 아주 드물다. 짜 놓은 개요를 보면 다음 단락에 무슨 내용을 쓸 것인가를 미리 알 것이다, 그러면 앞 단락의 내용에서 다음 단락의 소주제로 넘어갈 수 있는 이유와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다. 예컨대 앞 단락에서 “예술은 독창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다.”라는 주제로 썼다고 치자. 그리고 뒷 단락에서 “예술이 상업주의에 의해 본 정신이 흐려지고 있다.”라는 주제로 쓰게 되어 있다고 치자. 그러면 앞 단락의 마지막에 “……그런데 현대에 접어들면서 자본주의 위세를 발휘하게 되자 예술가들도 자본주의적인 틀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게 되었다. 라는 식의 매개문을 만들어 넣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글 읽는 사람이 다음 단락에 어떤 내용이 나오겠구나 하고서 예상을 하게 되고 , 그 예상이 맞아 들어갈 때 참 논리적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새 단락을 시작하면서 앞 단락의 내용을 언급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컨대 앞 단락에서 “남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사악한 부작용을 낳는가?”라는 내용을 썼다고 치자. 그리고 새 단락에서 “인간의 지배 욕망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주장을 담으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면 새 단락의 맨 앞에 “이처럼 사악하기 짝이 없는 지배 욕망을 건전한 방향으로 조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정도의 매개문을 넣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다음에 쓰게 될 ‘지배 욕망의 축소’에 관한 이야기가 자연스러워 진다.
(7) 단락 수는 최소한 4~5 개가 되도록 하라.
대학 입시의 논술의 분량은 대략 1,600자에서 2,500자 정도다. 서론을 한 단락으로 잡고, 또 결론을 한 단락으로 잡으면, 본론은 적어도 세 단락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본격적인 논의를 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1,600자 정도의 글이면 본론을 네 단락 정도로 잡는 것이 좋다. 본론을 서너 단락 또는 그 이상의 개수로 처리하면서 각 단락들이 논리적으로 발전해 간다는 느낌을 주게 되면 정말 좋다. 다만 각 단락에서 주장하는 소논지들이 분명해야 한다. 주장하는 바가 다른 것을 한 단락으로 묶어 처리하는 것도 나쁘지만 별다른 내용도 아닌데 모양 상 단락을 나누는 것도 나쁘다. 적절하게 서너 개의 단락으로 나누면서 단락마다 소논지가 문명해야 하고, 그 소논지들이 본론이 전개되면서 점점 더 논의가 심화되도록 해야 한다.
(8) 흥분하는 어조는 삼가라.
강력하게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과 흥분하는 어조로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혼동하면 안 된다. 낱말마다 색깔이 있고 그 나름의 성격이 있다. 똑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낱말을 선택해서 쓰는 가에 따라 글의 격이 아주 떨어지기도 하고 격조가 높아지기도 한다. 예컨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믿기지 않는 터무니없는 사건이다.”라는 문장과 “합리적인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건이다.”라는 문장을 비교해 보자. 앞 문장은 필자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과연 그럴 수 있는가 하고 열심히 생각해 보았다는 식의 주관적인 논법이다. 뒷 문장은 필자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납득할 수 없는 객관적으로 보아 엄연히 잘못된 사건이라는 식의 객관적인 논법이다. 논술에서는 가능하면 객관적인 논법의 문장을 구사해야 한다. 흥분하는 어조의 문장이나 낱말은 주관적인 논법을 연상케 한다. 그저 주관적인 자기 생각을 일방적으로 제시할 것 같으면 굳이 논술을 할 필요가 없다.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 자기 주장의 객관성을 높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논법을 구사해야 한다.
(9) 되도록 글씨를 깔끔하게 써라.
논술 지도를 많이 해 보니 글씨가 깔끔한 학생 치고 논리력이나 문장력이 서툰 경우는 아주 드물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정말이지 논리적으로 따져 보면 글씨가 좋다고 해서 글이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실제로는 글씨가 좋은 학생들이 글도 좋은 경우가 허다하다.
우선 글씨가 깔끔하고 좋으면 채점자들은 글 읽는 마음이 확 밝아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글이 잘 읽혀지는 정도, 즉 가독성(可讀性)이 높아진다. 채점자도 사람인 이상 이런 상쾌한 느낌 때문에 똑같은 내용일 겨우 글씨가 좋지 못해 읽기 힘든 글보다 더 좋은 점수를 주기 마련이다.
(10) 남들이 빨리 쓴다고 신경 쓰지 말라.
논술 시간이 대체로 두 시간 내지 두 시간 반으로 주어진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 시간 동안 고문을 당하듯 하겠지만, 차분하게 생각을 가다듬지 않고서는 좋은 논술을 할 수 없다. 시험이기 때문에 남들이 자기보다 더 빨리 더 열심히 써 나가는 것을 보면 약간의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논술은 망치기 십상이다.
특히 본문 쓰기에 빨리 돌입하는 옆 학생들의 모습에 위축될 필요도 없고 위축되어서도 안 된다.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또 개요 짜기에 이르기까지 논의의 틀이나 논점 또는 논지를 설정하고 그에 따라 논거를 마련하노라면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마련이다. 심지어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는 시험 시간 반 이상을 이 과정에 투여할 수도 있다. 그만큼 준비가 완벽해지면 본문 쓰기는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더 빠르게 완료할 수 있다. 물론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다른 학생들이 마치 술술 써 나가듯 하면 위축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자기 나름대로 시간을 조절하면서 자신 있게 쓸 수 있다 싶은 내용들을 떠올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차분하게 자기 자신을 믿고서 적절하게 자기 생각이 떠오를 때를 기다려야 한다.
우선 대학에서 논술 시험을 채점할 때 어떤 기준으로 채점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이를 중심으로 다음 열 가지 정도의 요령을 음미해 보자.
(1) 무슨 말을 하는 지가 분명하도록 하라.
논술 연습을 많이 했다고 해서 자신 없는 이야기를 함부로 늘어놓아서는 절대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채점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채점하는 사람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수많은 학생들의 답안을 찬찬히 정독하면서 읽기가 쉽지 않다. 그만그만한 수준의 답안들을 읽고 있노라면 지겹기도 하고 힘들기도 할 것이다. 대충 읽게 되면 그만큼 정수도 대충 어림짐작으로 주게 된다. 그런데 만약 답안의 문장이나 단락의 내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분명하지 않으면 채점자는 아예 귀찮아질 수도 있다. 읽기가 어렵고 무슨 말을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으면 당장 “아니, 이 학생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냅다 낮은 점수를 주기 쉽다.
우선 읽기 쉽도록 글을 써야 한다. 쉽게 읽혀진다고 해서 내용이 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용의 수준이 높은지 낮은지는 그 다음 문제다. 아무리 내용의 수준이 높아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를 포착하기 어려운 글은 절대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내용의 수준이 낮아도 분명하게 자기 의사를 개진한 글이 내용의 수준은 높은 듯한데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개진하지 못한 글보다 좋은 점수를 받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자신 있는 내용을 떠올려야 한다. 어디서 본 듯하다거나 그 때 공부한 것이 참 그럴 듯 했던 것 같은데 라는 식으로 어렴풋한 기억이나 지식을 활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대목대목의 모든 내용들이 최대한 자신만만하게 제시할 수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크게 논리에 어긋나지도 않고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창의성이나 참신성을 높이기 위해 감당할 수 없는 내용을 억지로 담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창의성이나 참신성보다 우선하는 것이 물 흐르듯이 서로 어긋남이 없이 쉽게 읽혀지는 논리성임을 명심하라.
(2) 개요 짜기는 완성된 문장으로 하라.
개요 짜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항목만을 열거하는 식의 개요가 있고, 각 항목을 아예 완성된 문장으로 풀어써서 만드는 개요가 있다. 개요를 짜는 단계에서 아예 완성된 문장으로 하나하나 써야 한다. 왜냐 하면 완성된 문장으로 써 보지 않고 그저 복합 명사형으로 항목만을 적어 보는 것만으로는 실제 본문을 써 나갈 때 글이 될지 안 될지를 확인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항목 형태로 개요를 짜 놓고서 성급하게 본문 쓰기에 들어가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허둥대기 일쑤다. 개요 짜기 단계에서 미리 완성된 문장으로 써 놓아도 잘 되지 않으면 자신 없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그럴 경우 자신 있게 문장으로 써낼 수 있는 다른 유사한 내용으로 바꾸어야 한다.
완성된 문장으로 개요를 짜 놓으면 본격적으로 본문 쓰기에 들어갔을 때 글을 쓰기가 훨씬 편하다. 물론 개요 짜기에 신간이 더 많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완성된 문장으로 개요를 다 써 놓으면 본문을 반 이상 쓴 셈이 되기 때문에 결국에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셈이다.
문제는 문장 개요에서 완성된 문장으로 써 놓은 것들을 어떻게 더 늘리고 보완하면서 요구하는 답안 분량을 알차게 작성해 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완성된 문장으로 개요를 작성하게 되면, 개요를 작성할 때 정확하게 무슨 뜻에서 무슨 의도로 그렇게 썼는가를 잘 알기 때문에 본 답안을 만들어 내는 데로 훨씬 더 유리하다.
(3) 서론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논술에 돌입한다고 생각하라.
서론은 잔소리하는 곳이 아니다. 많은 학생들이 서론의 첫 문장, 그것도 첫 글자를 무엇으로 시작해야 하느냐로 고민을 한다. 그러다가 은근슬쩍 우회로를 찾아 부드럽게 ‘폼’ 잡으면서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 내용이 논제와 직접 관련되는 것이면 다행인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말부터 끄집어내는가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채점자 또는 글 읽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들면 안 된다. 아예 서론에서부터 논제에 직접 공격해 들어가면서 써간다고 생각하고 서론을 시작해야 한다.
예컨대 “공자의 인이 갖는 의미를 현대 사회에 비추어 논하라.”라는 문제가 주어졌다고 해 보자. 어떤 학생의 경우, “세상에는 많은 사상가들이 있다. 어떤 사상가는 사랑을 외치고, 또 어떤 사람은 이성적인 지혜를 주장한다. 그 중 공자는 특별히 인을 주장했다.……”라는 식으로 서론은 시작한다. 이런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는 하나마나한 이야기일뿐더러 이미 문제에도 주어져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적 심성을 요구한다. 그런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하고, 일탈이나 소외, 탈(脫)도덕성을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런 현상은 서구의 사상이나 문화 탓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찍이 동양의 현인인 공자는 인간이면 누구나 우선 사람다워야 한다는 뜻에서 인을 주장했다.……”라는 식의 서론이 더 참신하게 눈에 들어올 것이다. 직접 논제와 관련된 내용을 서론에서부터 문제 삼아야한다. 그래야만 채점자가 처음부터 “음, 뭔가 진지하게 글을 시작하는구먼.”하면서 그 글에 호감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4) 결론은 결코 장식이 아님을 유념하라.
서론도 그렇지만 많은 학생들은 결론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허둥댄다. 할 이야기를 다했는데 또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덧붙여 글을 마무리해야 한단 말인가 하면서 걱정한다. 그러면서 마치 결론이, 선물을 포장하고 난 뒤 예쁜 종이꽃을 붙이는 마지막 장식 작업인 양, 어떻게 하면 근사하게 끝마무리를 할까 걱정한다.
채점자가 수도 없이 쌓여 있는 채점해야 할 답안지를 보면서 지루한 표정을 짓는다고 가정해 보자. 경우에 딸서는 결론을 먼저 보고 난 뒤 글을 읽기고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결론에 핵심적인 이야기가 들어 있어야 한다. “핵심적인 이야기는 본문에서 다 했는데요.”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핵심적인 이야기를 결론에서는 ‘새롭게’ 제시해야 한다. 결론의 첫 문장은 마치 서론을 ‘새로운 방식으로’ 압축한 듯하고, 둘째, 셋째 문장은 본론의 이야기를 ‘새롭게’압축해서 제시해야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 문장에서 ‘마치 예리한 붓으로 용의 눈에 눈동자를 찍는 듯한’ 완성의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한다.
앞의 서론 이야기에서 제시한 논제(공자의 인(仁)의 현대적 의미)를 다시 예로 들어보자. 결론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가능할까?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현대 사회는 기계화, 자동화, 대량화, 대중화 등의 현상을 보이면서 비인간화를 가속화한다. 이럴 때일수록 공자의 사상을 무시하면서 계속 나가고 있다.” 어떤 학생의 결론이다. 아마도 이 학생은 본론에서 현대 사회의 특징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공자의 사상이 왜 필요한가를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결론만을 보아서는 어떤 방식으로 공자의 사상을 살려나가야 한다고 말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더군다나 마지막 문장은 결론의 요지와 상충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위에 언급한 학생의 결론은 “디지털 혁명과 인터넷 혁명에 의해 현대 사회는 정보화라는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너무나 빠른 속도로 사회 전체가 변하면서 사람들은 더욱더 자신의 인간다움에 대해 반성할 여유를 잃게 된다. 공자가 말한 인은 자기에 대한 철저한 도덕적인 반성을 전제로 한다. 이렇게 보면 현대 사회가 발전할수록 인을 강조한 공자의 사상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됨을 알 수 있다.”의 내용으로 고쳐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5) 문장을 만들 때 명사에 적절한 관형구를 덧붙여 근거를 제공하라.
논술을 읽으면서 글 읽는 사람이 글쓴이의 논리적인 힘을 느끼는 것은 세세한 데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그러려면 문장 하나를 보더라도 논리적인 힘이 실려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카프카의 심판을 제시문으로 주고서, 예컨대 “사회의 악과 개인의 도덕성의 관계를 논하라.”라는 논제를 주었다고 해 보자. 카프카의 심판은 주인공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른 채 어느 날 체포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체포하러 온 삶조차 자기가 이 사람을 왜 체포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그저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이런 분위기를 염두에 두면서 위 논제에 대해 쓴다고 해 보자. “사회의 악은 개인의 도덕성을 힘없이 만든다.”라는 문장과 “사회 구성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겨나는 사회의 악은 사회의 규율을 벗어나 살 수 없는 개인의 도덕성을 힘없이 만든다.”라는 문장을 비교해 보자. 뒤의 문장이 훨씬 더 내용도 있고 논리적으로 힘이 있어 보인다. 왜냐 하면 밑줄 친 부분들을 첨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저 ‘사회의 악’과 ‘개인’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악’과 ‘~한 개인’을 대립시켜 말하게 되면, 명사를 수식하는 관형어가 문장 전체의 근거 역할을 한다.
물론 이렇게 쓰면 문장이 길어져 나쁜 문장이 될 수 있다. 문장이 길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문장을 짧게 써 뜻이 불분명한 것보다 문장을 길게 써 뜻이 분명한 것이 더 낫다. 물론 위에서 고친 뒷 문장은 이렇게 멋지게 쓸 수도 있다. “사회의 악은 사회구성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겨난다. 그리고 개인은 사회의 규율을 벗어나 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악은 개인의 도덕성을 힘없이 만들기 일쑤다.” 이렇게만 쓸 수 있다면 굳이 명사 앞에 긴 관형어를 덧붙여 문장을 못 생기게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많은 학생들의 경우, 이런 식으로 문장을 쓰지는 못하다. 그저 별다른 근거도 없이 위 첫 문장처럼 어디서 외운 것을 그대로 옮겨 쓰듯이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명사 앞에 그 명사의 특징을 밝혀주는 관형어를 덧붙여 줌으로써 논리적인 힘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6) 단락을 바꿀 때 적절한 연결 문장 내지는 연결 어구를 덧붙여라.
한 단락에서 새로운 단락으로 넘어갈 때에는 반드시 그렇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실마리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얼마만큼 되는가에 따라 글의 통일성과 논리성이 결정된다. 사실 이렇게 할 수 있는 학생은 아주 드물다. 짜 놓은 개요를 보면 다음 단락에 무슨 내용을 쓸 것인가를 미리 알 것이다, 그러면 앞 단락의 내용에서 다음 단락의 소주제로 넘어갈 수 있는 이유와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다. 예컨대 앞 단락에서 “예술은 독창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다.”라는 주제로 썼다고 치자. 그리고 뒷 단락에서 “예술이 상업주의에 의해 본 정신이 흐려지고 있다.”라는 주제로 쓰게 되어 있다고 치자. 그러면 앞 단락의 마지막에 “……그런데 현대에 접어들면서 자본주의 위세를 발휘하게 되자 예술가들도 자본주의적인 틀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게 되었다. 라는 식의 매개문을 만들어 넣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글 읽는 사람이 다음 단락에 어떤 내용이 나오겠구나 하고서 예상을 하게 되고 , 그 예상이 맞아 들어갈 때 참 논리적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새 단락을 시작하면서 앞 단락의 내용을 언급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컨대 앞 단락에서 “남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사악한 부작용을 낳는가?”라는 내용을 썼다고 치자. 그리고 새 단락에서 “인간의 지배 욕망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주장을 담으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면 새 단락의 맨 앞에 “이처럼 사악하기 짝이 없는 지배 욕망을 건전한 방향으로 조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정도의 매개문을 넣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다음에 쓰게 될 ‘지배 욕망의 축소’에 관한 이야기가 자연스러워 진다.
(7) 단락 수는 최소한 4~5 개가 되도록 하라.
대학 입시의 논술의 분량은 대략 1,600자에서 2,500자 정도다. 서론을 한 단락으로 잡고, 또 결론을 한 단락으로 잡으면, 본론은 적어도 세 단락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본격적인 논의를 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1,600자 정도의 글이면 본론을 네 단락 정도로 잡는 것이 좋다. 본론을 서너 단락 또는 그 이상의 개수로 처리하면서 각 단락들이 논리적으로 발전해 간다는 느낌을 주게 되면 정말 좋다. 다만 각 단락에서 주장하는 소논지들이 분명해야 한다. 주장하는 바가 다른 것을 한 단락으로 묶어 처리하는 것도 나쁘지만 별다른 내용도 아닌데 모양 상 단락을 나누는 것도 나쁘다. 적절하게 서너 개의 단락으로 나누면서 단락마다 소논지가 문명해야 하고, 그 소논지들이 본론이 전개되면서 점점 더 논의가 심화되도록 해야 한다.
(8) 흥분하는 어조는 삼가라.
강력하게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과 흥분하는 어조로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혼동하면 안 된다. 낱말마다 색깔이 있고 그 나름의 성격이 있다. 똑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낱말을 선택해서 쓰는 가에 따라 글의 격이 아주 떨어지기도 하고 격조가 높아지기도 한다. 예컨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믿기지 않는 터무니없는 사건이다.”라는 문장과 “합리적인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건이다.”라는 문장을 비교해 보자. 앞 문장은 필자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과연 그럴 수 있는가 하고 열심히 생각해 보았다는 식의 주관적인 논법이다. 뒷 문장은 필자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납득할 수 없는 객관적으로 보아 엄연히 잘못된 사건이라는 식의 객관적인 논법이다. 논술에서는 가능하면 객관적인 논법의 문장을 구사해야 한다. 흥분하는 어조의 문장이나 낱말은 주관적인 논법을 연상케 한다. 그저 주관적인 자기 생각을 일방적으로 제시할 것 같으면 굳이 논술을 할 필요가 없다.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 자기 주장의 객관성을 높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논법을 구사해야 한다.
(9) 되도록 글씨를 깔끔하게 써라.
논술 지도를 많이 해 보니 글씨가 깔끔한 학생 치고 논리력이나 문장력이 서툰 경우는 아주 드물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정말이지 논리적으로 따져 보면 글씨가 좋다고 해서 글이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실제로는 글씨가 좋은 학생들이 글도 좋은 경우가 허다하다.
우선 글씨가 깔끔하고 좋으면 채점자들은 글 읽는 마음이 확 밝아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글이 잘 읽혀지는 정도, 즉 가독성(可讀性)이 높아진다. 채점자도 사람인 이상 이런 상쾌한 느낌 때문에 똑같은 내용일 겨우 글씨가 좋지 못해 읽기 힘든 글보다 더 좋은 점수를 주기 마련이다.
(10) 남들이 빨리 쓴다고 신경 쓰지 말라.
논술 시간이 대체로 두 시간 내지 두 시간 반으로 주어진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 시간 동안 고문을 당하듯 하겠지만, 차분하게 생각을 가다듬지 않고서는 좋은 논술을 할 수 없다. 시험이기 때문에 남들이 자기보다 더 빨리 더 열심히 써 나가는 것을 보면 약간의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논술은 망치기 십상이다.
특히 본문 쓰기에 빨리 돌입하는 옆 학생들의 모습에 위축될 필요도 없고 위축되어서도 안 된다.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또 개요 짜기에 이르기까지 논의의 틀이나 논점 또는 논지를 설정하고 그에 따라 논거를 마련하노라면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마련이다. 심지어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는 시험 시간 반 이상을 이 과정에 투여할 수도 있다. 그만큼 준비가 완벽해지면 본문 쓰기는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더 빠르게 완료할 수 있다. 물론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다른 학생들이 마치 술술 써 나가듯 하면 위축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자기 나름대로 시간을 조절하면서 자신 있게 쓸 수 있다 싶은 내용들을 떠올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차분하게 자기 자신을 믿고서 적절하게 자기 생각이 떠오를 때를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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